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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an 14. 2022

순례자의 집

유은실 소설 <순례주택>을 읽고

우리가 얻은 신혼집은 방이시장 안쪽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잠실역까지 도보로 10분 거리, 올림픽 공원과 석촌호수, 서점과 백화점까지 모두 도보로 가능한 거리였다. 한 사람은 아직 학생이고, 한 사람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참이었으므로 우리에게 모아 둔 ‘목돈’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부모님께서 마련해주신 돈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겁게, 하지만 아늑하게 꾸려질 삶에 대한 기대로 가볍게 발품을 팔았다. 10년 전에도, (20년 전, 30년 전에도 그랬을 테지만) 서울의 임대료는 우리가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절대적으로 세가 비쌌을 뿐 아니라, 전세는 드물고 다달이 큰 부담을 져야 하는 월세가 대부분이었다. 기대감은 꺼져버리고 무거움만 커져갈 즈음, 8000에 20, 우리는 방 두 개짜리 매물을 발견했다.  


“이런 물건은 바로 가계약하지 않으면 놓쳐!” 

남편과 나는 곧장 부동산으로 향했다. 푹 꺼진 일인용 소파에 각기 앉아 달콤한 밀크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하나씩 받아 든 남편과 나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매물을 찾은 것인지,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 중개인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집 사장님은 아무한테나 세 안 줘요. 꼭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들면 주지. 사장님이 지금 상갓집 가셨는데 좀 기다려 봐요.”

이 집만은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을 남편과 눈빛으로 교환했던가. 낯선 공간, 말을 삼키며 한참을 기다렸다. ‘점을 보러 가면 꼭 이럴 거야.' 금테 안경을 쓴 점잖은 인상의 집주인은 남편과 나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이 이어졌고, 그다음은 악수, 선한 인상에 대한 칭찬과 앞날에 대한 축복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첫 둥지를 틀었다.


불현듯 신혼집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유은실 작가의 청소년 소설 ‘순례주택'을 읽다가였다. ‘순례주택’의 건물주 김순례 씨(75세)는 유능한 세신사로, 때를 밀어주고 번 돈으로 4층 건물인 '순례주택'을 짓는다. 김순례씨는 ‘순하고 예의 바르다’는 순례(順禮)에서 순례자(巡禮者)에서 따온 순례(巡禮)로 개명을 하는데, 자신이 지은 집에도 순례(巡禮)라는 이름을 붙인다. 순례주택 1층에는 상가 하나와 주차장이 있고, 옥상엔 옥상 정원이 있다. 옥탑방도 하나 있는데 입주민 공용 공간이다. 순례씨는 옥탑방에 라면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고 입주민 영선씨는 커피 원두를, 홍길동씨는 김치를 채워 넣는다. 임대료는 시세를 따라 정하지 않고 순례씨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다. 아, 이곳은 유토피아가 아닌가?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씨는 최측근인 수림에게 묻는다. 소설 속에는 순례씨를 비롯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론 정반대인 수림이네 밉상 가족들도 나오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오래도록 마음이 따뜻하고 부풀었던 이유는 순례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성장하려고 발돋움하는 이들을 뒤에서 시원하게 밀어주는 큰 어른. 순례씨를 이정표로 삼아야겠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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