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라이프 앤 페이지)
하재영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건축의 실제와 미학을 담은 책인 줄 알고 펼쳤다가 저자가 지나온 공간의 궤적을 따라 시간을 걷게 되는 책이다. 저자는 1979년 대구 출생이다. 2006년 계간지 ‘아시아’에 단편 ‘달팽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두 권의 소설책과, 2018년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2020년에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책 <운동화 신은 우찬이>를 출간했다. 저자 소개란 밑에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제시되어 있는데 비공계 개정이라 사진과 동영상은 볼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한 권의 책이 '집이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 작가 하재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대구 북성로 양옥집에서 서울 신림동, 금호동 등 재개발 지역 원룸과 다가구 주택, 구기동의 구축 빌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지나온 아홉 개의 집들을 시간순으로 되짚어본다. 기억은 쓰는 행위를 통해 재구성된다. ‘집에서의 자리’가 ‘젠더’의 관점에서 재조명된다. 저자에게 행복한 기억만으로 남아 있는 대구의 북성로 집은, 맏며느리이자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인 엄마에겐 노동이 집중되는 가부장제 만연한 장소였다. 거쳐온 그 어느 집에서도 엄마는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다.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집’이라는 공간 밖으로 사라지곤 했던 아버지, 침묵하곤 했던 아버지.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들이 가부장제가 부여한 ‘강인한 해결사’라는 역할에서 기인했음을 깨닫는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이후의 이야기는 ‘자기만의 방’을 확보하기 위한 분투기에 가깝다.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p.55)를 이야기하는 부분에 이르면, ‘자기만의 방’은 젠더의 이슈를 넘어선다. 가난과 현실 앞에서 선 젊은이의 보편적 초상이 그려진다. 자신이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저자가 처음으로 안간힘을 쓰는 행신동 집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어른이 되기 위한 발돋움, 그 첫걸음을 뗀 공간이기 때문이다.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로 시작한 이야기는 “아빠에게 집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끝난다. 흥했던 시절의 상징인 크고 화려한 집들 뿐 아니라, 실패와 가난으로 거쳐온 초라한 집들조차 한결같이 소중히 여겼던 아빠의 태도를 회상한다. 저자는 “집도 생명체와 같아서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던 아빠의 말을 복기해낸다. 집은 저자에게 “생명체처럼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p.197) 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김현경, 김혜순, 메리 올리버, 샬럿 브론테, 아니 에르노, 에밀리 디킨스, 에이드리언 리치, 잉에보르크 바흐만, 정희진, 최승자, 허수경에 이르는 여성 작가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동시에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독자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앞서 소개된 수많은 여성 작가와 서사들과 교류하고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집’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에세이’이라는 그릇에 담고 있어 쉽게 읽힌다. 하지만 기억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길어낸 사유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자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