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친구가 퇴근길에 우리집에 놀러를 왔다. 우리의 수다를 위해 아이들을 TV 앞에 고정시켜두고 (얘들아 미안!) 남편과 나, 그리고 친구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떡볶이와 김밥을 담았던 접시가 비워지고 보이차와 무화과 파이를 낼 즈음이 되자 이야기가 봄꽃처럼 활짝 피었다. 아이들이 졸려워할 때가 되었지 싶어 잠깐 바라보다가 늦게 자는 날도 있는 거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도 괜찮긴 한데요. 화장을 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친구에게 어제 내가 학생에게 들었던 말을 전했다. 전에 친구가 '화장'에 관해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는 내 친구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입사 후 주변에서 자꾸 지적을 하는 탓에 한동안은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화장을 왜 해야 하지?'라는 물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그렇게 내 친구는 더 이상 화장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화장'에 관한 자신 에피소드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친구가 화장을 하고 출근했던 어느 날인가, 친구보다 훨씬 윗 연배의 여성분들이 친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어머, 화장하면 이렇게 예쁜데 왜 안 하고 다녔어?" 그림이 그려졌다. 호의를 듬뿍 담아 예쁘다 예쁘다 칭찬했을 얼굴들.
저 원래 졸라 예쁜데 왜 화장을 해야 되나요?
친구는, 질문이 아니었을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넘어갔다. "맞아, 너 졸라 예뻐." 내가 말했다. "언니도 졸라 예뻐요." 친구가 말했다. "너희 둘 다 졸라 예뻐." 남편이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화장을 하지 않은 세 개의 얼굴이 한참을 웃었다. 농담같이 던졌을, 하지만 단단했을 친구의 말에 눈가가 촉촉해진 분이 한 분 계셨다고 했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해봤지?' 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셨다고 했다. 친구와 나, 그리고 남편은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미추의 구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 주관적이라는 것과 '익숙함'이 아름다움의 범위를 얼마나 넓혀주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를 보내고, 때를 놓쳐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누었다. 까만 천장 위로 얼굴이 뽀얗고 깨끗했던,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찰랑였던, 손발이 보드라웠던 날들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화장을 좀 하는 편이 낫겠어', '마스크팩이라도 하고 관리를 좀 하자.' 다짐했던 오늘날의 나는, 내가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이 아이들을 낳아 기르느라 그런 것만 같았다. 건조하고 피곤한 얼굴이 자기연민과 한 몸이 되는 날이면 내가 세상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까만 천장 위에 지금의 내 모습을 띄워본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눈이 깊다. 눈꼬리 끝이 전에 없이 깊게 파여 웃고 있다. 입가에 옅게 잡힌 괄호 모양의 선도 오늘따라 명랑하다. 광대뼈 주변의 기미도, 눈 밑에 옅게 깔린 다크서클도 은은하다. 서른여섯의 나는, 제 삶을 온전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는, 졸라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