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그대의 반짝임

나의 애도는 행동으로 대신하겠습니다.

by 윤소정

(거실에 놓인 트램펄린에 나란히 누워 아침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 라윤아, 엄마가 어제 라윤이한테 화낸 거 미안해. 라윤이는 여섯 살인데... 라윤이가 생각주머니도 크고, 뭐든지 알아서 척척 잘 하니까 엄마는 자꾸 라윤이가 열여섯 살인 줄 아는 것 같아. 어제도 엄마는 라윤이가 열여섯 살인 줄 알았나 봐. 라윤이 어제, 엄마가 화나서 하는 이야기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 어려운 말만 하고, 화내서 미안해.

라윤: (라윤이의 작은 코를 내 코에 가져다 대며) 히힛. 엄마, 웃겨! 귀여워!

나: 그래도 엄마는 라윤이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요즘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낸다. 전에 없이 쉬이 성내고 무섭게 침잠한다. '날씨가 더워서, 몸이 곤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여름 이제 시작인데 어쩌나!' 하며 차를 몰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막 좌회전 신호를 받아 커브를 도는데 라디오에서 "띠띠띠, 띠익~"하고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장의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면 나타나는 현상, 수록된 곡 모두가 하나의 멜로디가 되듯 (의식적으로는 분명 트랙의 순서를 짚어내지 못하는데, 다음 곡 시작 전에 그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즐겨 듣는 클래식 방송의 CM송이 반갑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목소리는 '비유'라는 단어로 문장을 열었다. 일순간 툭하고 내려앉은 마음, 그렁그렁 일렁이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스피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벌써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라디오 녹음실에 당도해있었다. '애도하는 마음, 이곳에도 있는 것이지요?'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잘 닦인 투명한 창 너머를 기웃거렸다. '작가 분이신가요? 프로듀서 분이신가요?'하며 그 얼굴을 찾고 있었다. '아, 아니군요. 당신이 실어 보낸 메시지는 그런 게 아니었군요.' 우아함으로 가라앉혔으나 경쾌하기만 한 목소리 앞에서, 나는 나의 주책 맞은 마음을 바쁘게 주어 담았다. 고정되어버린 시선을 마저 거두어들이려는데 들려오는 소리, 낱말과 낱말 사이 영혼이 증발하고 힘을 잃은 낱말들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거였다, 역시.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껏 나는 딱히 그를 존경한다거나,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유'라는 하나의 단어 앞에서 나의 가벼운 마음은 무겁게 무너져버렸다. 아마도 그가, 이 시대의 하나의 '정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권위의식이나 포장 없이, 일상에 스며들듯 세상에 반짝임을 보탠 또 하나의 스승, 그를 잃고 지금 우리는 슬프다. 나는 슬프다.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화도 난다. 이렇게 만든 세상도,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그 일을 두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악의적인 말들도 밉고 싫다.


'어떤 기사든 기사에 달린 댓글은 보지 말자.' 다짐한 것이 벌써 오래전인데, '비유'라는 한 단어에 (상상으로나마) 라디오 방송국까지 내달리는, 공감에 목마른 나는 자꾸만 화면을 스크롤한다. 인간에 대한 회의에 빠져든다.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 그것은 '나는 어떠한가? 나의 분노는, 나의 슬픔은 순수한가?'라는 자기검열을 지나, 몹쓸 훈육에 도달한다. 그래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집 여섯 살 꼬마. 문방구에서 스티커 하나 더 사달라고 했다가 '만족하는 삶'이니 '지혜'니 '물욕'이니 하는 알 수 없는 말들 속을 울며, 헤매야 했다.


'에구머니나! 이제 겨우 만 다섯 살이 되는 아이에게 내가 뭘 한 거지?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고 이해했냐고 다그쳤구나.' 뒤늦은 깨달음. 하지만 늘 엄마보다 너그러운 아이는 미안해하는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반짝이는 예쁜 보석 스티커가 갖고 싶었다고.


이제 곧 여섯 번째 생일을 맞는 라윤아, 엄마가 미안. 네 안의 반짝임을 한껏 맘껏 드러내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세상의 꼴과 상관없이 착한 아이로, 바른아이로 씩씩하게 극복하며 살라고 가르쳐서 미안해. 라윤이가 진짜 열여섯 살 되었을 때는 우리 사회가 좀 더 살만한 곳이 되도록 엄마도 애써볼게. 행동할게. 생일을 축하한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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