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까리 May 29. 2021

빨래와 독립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고민만 쌓여가는 일상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을 향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산다.


그렇다고 내게 독립의 순간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군대 2년, 해외 노동자 1년, 그리고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자취 1년(집과 학교가 가까워 사실상 자취의 개념보다는 과제의 늪에서 지친 몸을 달래줄 쉼터의 용도) 전체 인생 중 약 80% 이상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제는 나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막상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결정적 순간에서 주저하게 된다.


나의 독립을 방해하는 주범은 바로 '빨래'.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홀로 오래 지낸 친구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격하게 공감한다. 그만큼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저 '빨래'란 녀석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친구임을 경고한다.

(아마 홀로 오래 살았지만,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정리정돈을 너무도 사랑하여 빨래는 행복감으로 직결된다거나, 외출한 틈을 타 집안일을 정리해주시는 분이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거나...)


무튼, 해외에서 일하면서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는 속옷과 양말은 빨래를 미루던 내게 난생처음으로 팬티 없이 외출하는 굴욕을 선사했고, 그 이후 적어도 3일에 한 번은 빨래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때의 기억으로 친구와 자취할 때까지도 술을 좀 많이 먹은 날이면 집에 도착해서 빨래 돌리고 잠이 들어, 아침에 세탁기 속 물에 젖은 빨래를 보며 후에 지난날의 과음을 후회하곤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독립한다면 내게 건조기는 필수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점의 강박에만 사로잡힌 나에게 몇 없는 비싼 하얀 티가 얼룩도 모자라 잿빛으로 바래진 후에야 색깔을 구분해서 빨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애착 니트는 꼬까옷으로 변한 후에야 옷마다 세탁방식에 맞게 빨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새삼 대단한 건,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조언을 구한 엄마의 답변이 "응, 당연하지 엄마 빨래할 때 못 봤니?"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빨래를 널어 말리고, 잘 마른 빨랫감은 고이 접어 정리해 놓는 일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빨래' 하나만으로도 독립을 망설일 수 있다는 내 의견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임을 고집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간절히 '독립'을 원하고는 있지만, '빨래'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오늘의 '나'는 속으로는 그 모든 것에 대해 귀찮음이 더 크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하겠죠? 아니 해야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