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문맹의 시대
때는 2002년 한창 한일 월드컵으로 축제인 그때.
예기치 않게도 운명은 나를 이방인으로 이끌었다.
미국 서부의 워싱턴(Washington) 주 시애틀(Seattle)이란 도시에서 유학생활이 시작된다.
영어란 언어도 서툴고 모든 것이 낯설었던 외국인이었지만 다행히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하루는 룸메이트에게 미국 고유의 전통 음식(Authentic American Food)이 어떤 거냐고 물었다. 전형적인 금발과 파란 눈을 지닌, 동부의 고등 교육을 받고 자라온 벤이란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글쎄... 에그낙(eggnog) 정도??"였다.
에그낙을 굳이 풀이하자면 우유와 달걀로 만든 약간 달달한 (칵테일) 음료 정도라 할 수 있겠다. 그 정도로 미국의 전통 음식은 별반 없다는 말인 걸까?
다양한 국가들에서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많은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음식들을 접하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음식 문화가 무얼까 하는 막연한 의문이 일었다.
한국 음식 고유의 정체성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불고기나 비빔밥, 김치처럼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들이 있다. 하지만 뭐라 할까?
미국이나 중국, 일본이 아닌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런 거 말이다.
정말 우리만의 독특한 음식 문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만한 것이 어떤 것일까?
아마도 김치를 담그는 김장 문화,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같은 장 문화, 제례 음식 문화 등등 여러 가지 떠오를지 모르겠다.
모두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고유의 식문화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견이 있겠지만 이 와중에 개인적으로 하나 꼽으라 한다면 주저 않고 우리나라의 '나물 문화'를 얘기할 것이다.
봄이면 두릅과 참나물, 여름이면 취나물과 돌나물, 가을에는 도라지와 더덕, 겨울에는 무청이나 냉이, 달래 등등 밥상 위에 자연스럽게 오르는 이들은 나물 반찬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여러분들은 나물 반찬을 즐겨드시는가?
뜬금없이 웬 나물을 운운하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적인 건강기능식품과 알약 형태의 미네랄 보충제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는 자연에서 직접 몸을 회복시킬 지혜를 알고 있었다.
그 중심에 바로 나물이 있다. 나물은 단순한 반찬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음식이자 가장 오래된 천연 영양제 중 하나로서 이미 그 자체가 약이다.
무엇보다도 나물은 우리의 삶과 문화 그 자체였다.
이 파릇파릇한 화초같이 생긴 풀은 풀솜대라고 한다. 4월에 구경할 수 있는 봄나물 중 하나인데 풀솜대의 유명한 별명이 있다. 그것은 지장보살이다.
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같이 엿날 보릿고개 때 주린 배를 채워준 고마운 나물이라고 하여 지장보살나물이라고 불린다. 오죽했으면 지장보살이란 말이 붙었을까?
나물은 춘궁기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나도 살기 힘든 시절 우리네 생명을 지탱해 준 생존 음식이었다. 실제로 보릿고개니 춘궁기니 하는 이 시기에는 굶어 죽는 이들도 많았고 식량 대신 풀뿌리나 나무껍질마저 먹기도 했다. 겨울을 지나 가장 먼저 땅 위로 올라오는 '먹거리 자원'인 나물을 죽이나 국을 끓여서 먹으며 배를 채웠다. 별도의 농사 없이 산에서 채집만으로 확보가 가능한 자연적인 식량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산간 지역이나 가난한 농민들, 여성과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산에 올라 나물 채취를 많이 했었다. 나물은 어쩌면 이러한 아픈 역사의 소산이다.
외국에서는 '독초'라고 해서 먹지 않는 풀인 고사리를 우리는 너무나도 맛있게 잘 먹고 있으며 심지어 비빔밥이나 육개장, 제사상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식재료로 쓰고 있다.
사실 고사리는 생으로 먹으면 독성이 있다.
특히 프타퀼로사이드(ptaquiloside)라는 발암 가능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서구권에서는 ‘절대 먹지 말아야 할 식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화학물질은 초식동물과 병원균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기제로 작용하며 주변 다른 식물 종의 성장을 억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고, 말리고, 우려내고, 다시 삶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독성을 무마시켰다.
이는 단순히 조리법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세대를 거쳐 경험적으로 체득된 오랜 지혜이다.
고사리만 그러한가?
우리는 취나물, 두릅, 곰취, 삽주, 방풍, 다래순, 엄나무순 등 다른 문화권에서는 낯설거나 먹지 않는 수많은 산나물을 귀하게 여긴다. (심지어 비싸기도 하다!!!)
이들 중 일부는 날로 먹으면 쓰고 떫고 독한 맛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절한 손질과 조리 과정을 거치면
먹기 용이하면서도 그 계절과 풍토의 맛과 향을 온전히 전하는 음식으로 변모케 된다.
비록 처음에는 쓰고 떫은 풀일지언정 조금 떼어서 천천히 씹고 음미해가다 보면 예상과는 달리 은은한 단맛도 느낄 수 있고, 청량한 산미도 느낄 수 있으며 정말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삶과 균형 있는 영양은 이런 다채로운 맛이나 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여기엔 중요한 철학이 담겨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독일지언정 그 무언가를 단순히 버리거나, 제거하고 배척하는 대신 그것을 우리 몸에 맞게 다루는 법을 궁리하며 깨우치고 배워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나물이라는 식문화가 가진 위대한 힘이며 생태적 음식 문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한국인은 ‘나물 민족’이다. 이는 단순히 채소를 많이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 식생활은 산과 들에서 자라나는 풀 한 포기까지 소중하게 음식이자 약으로 삼았던 생존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화되어 가는 것이 더욱 선진의 길이라는 인식하에 우리는 점차 이런 지혜를 잊고 나물을 외면하게 되었다. 도시인의 식탁에서는 나물보다 포장된 단백질, 정제된 탄수화물이 중심을 차지하며, 이는 곧 만성 미네랄 결핍과 연결되었다. 특히 식품 가공과정에서 미네랄은 손실되기 쉽고, 염분과 당분은 오히려 과다하게 섭취되는 경향이 있어 체내 전해질 균형을 더욱 무너뜨리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나물문맹’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우리가 나물의 맛을 모르는 것뿐 아니라 계절의 흐름과 땅의 질서에서 멀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식생활 문제가 아닌 생태적 단절과 자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자리해 버렸다. 나물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위대한 유산을 모른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나물은 더 이상 기근을 타개하기 위한 구황식물이 아니다.
전 세계인들이 고통받는 대사성 질환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건강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래서 세계인들이 이런 귀한 경험을 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기도 한다.
반드시 음식을 통해서 섭취되어야만 하는 필수 미네랄들. 이를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방식 중 하나가 '나물 섭취'라고 생각한다.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몸에 유익한 화학 물질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양 깊은 곳에서 흡수한 다양한 미네랄 성분을 뿌리와 잎에 저장하고 있다.
현대 영양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미네랄의 중요성을 설명하지만 그 해답은 이미 자연 속에 존재해 왔다. 인류는 나물을 통해 미네랄을 보충해 왔고, 그 지혜는 수천 년간 검증되어 온 것이다.
나물은 가장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 미네랄 보충제다.
이제 그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교육하여 잃어버린 식문화의 자리를 회복해야 할 때다.
음식과 약은 본래 하나이며 이를 잘 알고 활용했던 우리의 삶이 진정한 K-culture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