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그와 K는 병원에 가기 전 잠시 동헌의 관아에 앉아 쉬기로 한다. 그들은 앉아서 동백꽃이 핀 나무를 바라본다. 바닥에는 흐른지 오래되어 굳어버린 피와 같은 검붉은 색의 동백꽃 잎이 흩뿌려져 있다. 그녀는 입을 쉴 새 없이 놀린다. 그런 K가 그는 낯설면서도 좋다. 그는 지난 몇 달간 K가 조만간 본인을 떠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아니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K가 떠나는 것을 막고 싶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안다. 자신의 삶 중에서 예측 가능한 것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는 처연한 사실, 그가 삶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이러한 부분에서부터 점점 초라해진다.
그는 근 한 달 정도 K와 만날 때면 두려움에 떨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표정과 말이 없는 K는 익숙하면서 낯설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K는 오늘 가끔은 입꼬리를 연체동물처럼 자연스레 흐물거리며 웃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양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는다. 지금의 K는 K 본인이 직접 출연한 졸업작품 속 여배우 같다. 미간의 정교한 움직임, 완만한 파도처럼 잔잔히 요동치는 그녀의 발성까지, 그러나 지금, 영화와 다른 것은 우리를 지켜보는 카메라가 없는 것, 그녀의 영화의 쇼트 길이가 평균적으로 1분을 넘지 않는다고 하면, 지금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 아니면 이전부터 시작해 훨씬 오랜 시간 지속 되어가고 있다는 것. 공교롭게도 그녀와 그는 그녀가 연출하고 출연한 졸업작품을 주제로 대화를 이었다.
그녀는 졸업작품을 만들기까지의 장애물이 매우 많았었다. 특히 지도 교수와의 마찰이 제일 고민거리였는데 물론 그도 이전부터 계속 들어와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최 교수는 K의 트리트먼트부터 시나리오까지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했고, 전면적으로 뒤엎고 다시 써보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뜻을 굽이지 않았다.
“이건 나의 영화라고, 최교수의 영화가 아니라.”
교수와의 마찰이 계속되자 지친 교수는 K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본인의 이름을 빼라는 것, 그리고 내가 지도하지 않았으니 워크숍 제작 지원비를 지급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작 지원비는 200만 원 정도로 영화 제작비 400만 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녀에게는 여분의 돈이 없었고 결국 최교수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교수랑 대화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하지만 K는 너무나도 완고했다.
“그런 무례하고 덜떨어진 교수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고? 웃기시네. 돈은 내가 벌든, 줄어든 예산으로 찍으면 돼. 협박에 굴복한 상태로 영화를 만들면 반드시 썩은 내가 나는 영화를 만들게 될 거야. 차라리 돈 없이 찍는 것이 나아.”
K는 이후 배우들에게 사정사정해서 페이를 깎았고, 회차를 최대한으로 줄여 타이트하게 프로덕션을 진행했다. 피곤해하는 스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스텝들에게 최선을 다했던 K였기에 스텝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K는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그는 영화를 포기한 상태였기에 그런 K의 모습을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질투심도 느꼈다. 아니 꽤 커다란 질투심이었다. 그는 속으로 은근히 교수의 말이 맞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K는 보란 듯이 영화를 완성해 냈고 전체적인 완성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는 K의 졸업영화를 끝내 졸업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없도록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