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동헌이 그에게 짧은 도피의 공간으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그의 낡은 초등학교 바로 옆이었기에 하교 후 어린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아이들에게 돌 미끄럼틀이라고 불리는 흉측하고 울퉁불퉁한 직삼각형의 초록색 콘크리트 덩어리가 있었다. 눕혀진 직삼각형의 뒷면에는 녹슨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아이들은 이 문을 가지고 시시한 괴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예전에 초등학생들만 골라서 죽이던 연쇄살인범이 시체를 모아두는 곳 이래.” “북한이 핵을 쏠 때를 대비해서 만든 지하대피소라던데?” 이런 괴담들은 돌 미끄럼틀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주는데 일조하였으며 더 많은 아이들을 그 흉측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올라가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신화의 위에 올라섰으며, 미끄럼틀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바지 뒤쪽이 쓸려 엉망이 되었고 발목과 정강이가 쓸려 피가 나는 일이 잦았다. 아이들의 엄마들이 그곳을 찾아가 크게 타이르는 소리가 동헌에 자주 울러 퍼졌다. “펑펑” 아이들의 엉덩이를 세게 치는 소리, 그때 그는 아이의 바지를 터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엉덩이를 세게 때리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리가 종적을 감출 때까지 그곳에 남아있었다. 마지막까지 같이 남아있던 친구를 보내면 그는 차갑고 거친 흉측한 콘크리트 덩어리 신화 위에 혼자 앉아 서서히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과목 중에서 국어를 제일 좋아했고, 과학을 제일 싫어했지만 그 시간만큼은 과학을 열심히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흉측한 콘크리트를 뒤덮는, 거대한 하늘의 눈치채지 못할 변화에 매일 집중했고 알고 싶었다. 왜 하늘은 따뜻하게 어둠을 가져오는지. 역시나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늘은 그의 작지만 빛나는 동공을 노란색으로 뒤덮었다. 마치 오렌지 주스를 지구 전체에다가 쏟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저분한 것은 못 참는 신이 흘린 오렌지주스를 검은색의 헝겊으로 바로 닦아내듯이 금방 어둠이 그를 뒤덮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왔다. 그는 울퉁불퉁한 돌 미끄럼틀을 뒷손으로 짚으며 엉덩이가 닿지 않게 천천히 내려왔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돌 미끄럼틀은 없다. 학교가 없어져서 없어진 건지, 남북한이 분단된 지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 집에 딸린 작은 부엌 불이 아직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내뿜는 새벽이 되면 그는 자신의 신체에 반 정도 되는 채를 짊어지고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동헌의 가장 넓은 부지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연못 앞의 평지는 노인들의 배드민턴 경기장이었다. 네트가 쳐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손수 휴대용 네트를 들고 다닐 정도로 배드민턴에 열성적이었는데 그의 할머니도 그 노인 중 한 명이었다. 할머니가 그에게 셔틀콕을 건넨다. 그는 셔틀콕의 끄트머리를 쥐고 조심스럽게 떨어트려 배드민턴 채의 중앙에 정확히 맞추려고 하지만 채는 여러 번 허공을 가른다. 그런 하루가 계속 반복된다. 그의 키는 조금 더 자랐고 어느덧 서브 정도는 간단하게 넣을 수 있는 실력을 금방 갖추게 된다. 그는 K가 카메라를 갖다 댄 연못에 시선을 옮기자 작은 연못에 둥둥 떠 있는 셔틀콕을 보았다. 아직도 새벽 이 자리에서 매일 휴대용 네트가 펴졌다가 접히며 여전히 노인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모여 사람들이 아침을 시작할 때쯤 해산하는 일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