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러브 슈프림. 03

by 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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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동헌의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최근에 새로 산 낡은 Rollei 사의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찍었다. 옛 관아와 그 안에 배치된 관사의 복장을 한 마네킹을 찍었고 듬성듬성 어설프게 배열된 묘비석을 찍었으며 꽃 덩굴이 감싸고 있는 벤치에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는 할아버지들 그리고 그가 할머니와 함께 배드민턴을 함께 치던 작은 연못을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여기 예전에도 자주 왔겠다. 집이랑 가깝기도 하고 다니던 학교 바로 옆이니까.”


동헌은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 그에게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 아니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의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공간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울산의 할머니 집으로 가족이 들어가서 살 게 되었는데 서로의 성향이 정반대였던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거의 매일을 다투었다. 날카로운 고성이 오갔고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면서 둔탁하지만 큰 소음이 집안 전체를 휘감았다. 그런 소음을 피하기 위해 그는 존 콜트레인의 ‘자이언트 스텝’을 들었다. 그가 존 콜트레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학교에서 진행한 유해약물예방교육에서였다. 많은 학생들은 당연하게도 유해약물예방교육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실의 딱딱한 나무의자보다 훨씬 부드러운 직물섬유 재질의 의자에 앉자 쏟아지는 졸음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잠을 청했고, 어떤 학생들은 문제집을 가져와 자습을 하기도 하였다. 가끔씩 선생이 직접 학생들을 직접 깨우기도 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만두었다. 시청각실의 작은 스크린에서 마취성분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학생들은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그는 영상이면 닥치는 대로 봤다. 그것이 어떤 영상이든, 이미 봤던 영상이든 상관없이 잠을 취하지 않고 끝까지 봤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의지로 행해지는 행위가 아니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그만의 루틴 같은 것이었다. 어김없이 스크린에는 말을 타고 빨간 담뱃값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 건장하고 마초스러운 말보루 맨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어김없이 스크린에서 시들어가는 꽃들처럼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가 그가 처음 보는 영상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유해약물예방교육 영상과는 달랐다. 스크린에는 각자가 맡은 악기에 집중하는 흑인들이 보였고, 그들의 연주는, 자유라는 것이 하나의 물질적 형태로서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에 찬 상태로 말할 수 있을 것만큼 자유로워 보였다. 존 콜트레인은 그들 중 하나였다. 말보루맨들처럼 그들도 영상의 후반부에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지만, 존 콜트레인만은 그렇지 않았다. 색소폰을 연주하는 존 콜트레인의 저 모습은 본다면 그 누구도 그가 무너져 내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강박적으로 소리를 빽빽하게 하여 빈틈을 없애는 듯한 그의 스타일은 갑작스럽게 파고드는 집안의 고성을 막기에는 탁월했다. 그럼에도, 단단하고 촘촘하게 구성된 선율 안으로 괴성이 서로 앞다투어 비집고 들어올 때면 그는 항상 동헌으로 향했다. 관아에 앉아 아까부터 듣고 있던 ‘자이언트 스텝’을 이어 들었다. 그는 사실 재즈 아티스트는 존 콜트레인밖에 몰랐고, "Mr. P.C."라는 트랙이 시작되면 그는 항상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미 시간이 멈춘 관아에 앉아 시간이 흐르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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