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제주도의 부속도서, 추자도, 가파도, 비양도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추자도 배편이 기상악화로 결항되었다. 우리는 서둘러 하루치 여행 일정을 다시 짜야했다. 3개의 부속섬들을 모두 방문하려다보니 이동시간이 길어졌다.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여 한라산 등산을 포기했더랬다. 우리는 추자도 배편이 취소된 김에 포기했던 한라산 영실코스를 오르고, 영실코스 들머리에서 가까운 서귀포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일정이 정리되자마자 허겁지겁 자연휴양림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평일이다보니 생각보다 예약 가능한 데크가 많이 남아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휴양림 야영지 예약을 무사히 마치고 제주에 도착했다.
저녁비행기로 도착해서 제주시에서 1박을 해야했다.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어리목코스 들머리로 이동했다. 우리는 어리목코스로 올라 영실코스로 하산하기로 했다. 한라산을 성판악, 관음사 코스로 오른 적은 있었지만 영실코스로 오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실코스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고, 마땅히 배낭을 맡길 방법도 없어 우리는 박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기로 했다.
길은 한라산답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계단과 데크 길을 차분히 올랐다. 산을 얼마나 올랐을까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등산로 옆 평상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욕심같아선 조망이 트이는 자리까지 올라 점심을 먹고 싶었지만 배가고파 참지 못하고 점심을 해치워버렸다.
이어지는 계단을 몇 번 오르고 나니 드디어 조망이 트였다. 한라산의 유려한 산능선이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신이 나 발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등산길을 걸어야했던 백록담 코스와는 다르게 영실 코스는 한두시간만에 조망이 트이고 백록담 남벽이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쉽게 오를 수 있음에도 아름다운 조망이 반기는 영실코스는 참 좋더라. 들인 노력에 비해 너무나 큰 선물을 받는다.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 걸까. 우리는 남벽분기점까지 오를 계획이었지만 입산 통제시간에 5분 늦어 가지 못했다. 어차피 구름이 빼곡해 가더라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구름이 껴도 좋았다. 비가 와도 좋았다. 천천히 천천히 풍경을 즐겼다.
영실코스로 하산하는 길에는 멀리 봉긋한 오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산길은 발걸음이 더 가벼웠지만 빨리 끝내기 싫어 틈날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둘러보곤 했다. 산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였던 산들도 올라보면 하늘 아래 같은 산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한라산은 대체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진 산이다. 마치 사람들이 이 곳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한라산은 아름다운 얼굴들을 이곳 저곳에 마련해두었다.
우리가 묵을 서귀포자연휴양림까지 가려면 하산 후 버스정류장까지 40분을 걸어야한다. 그것도 아스팔트 길로. 그런데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창문이 열렸다. 타라고 하셨다. 알고보니 우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하산했던 어르신이셨다. 한달에 두어번은 한라에 오는데 돌아갈 때는 꼭 이렇게 사람들을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신다고 하셨다. 너무나 감사했다. 영실매표소를 지나 우리가 묵을 서귀포 자연휴양림까지 데려다주셨다. 원래대로라면 휴양림까지는 2시간을 넘게 차도를 걸어야했다. 덕분에 해지기 전에 텐트를 치고 편히 쉬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도움을 받게 될 때가 많다. 우리는 여행자 처지이다보니 되갚아 드릴 방도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감사합니다만 연거푸 읊조릴 뿐이다. 드릴 수 있는게 없다. 이미 알고 계실거다. 그럼에도 도와주시는거다. 여행자에게 나눠주시는 정이란 그런 것이다. 고맙고 또 고마워할 밖에.
서귀포 자연휴양림은 두번째 방문이다. 우리의 첫 백패킹여행을 했던 때에 이곳에 왔었다. 백패킹으로 같은 장소에 두번째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왔음에도 익숙함이 있었다. 손에 익은대로 텐트를 치고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등산 후 먹는 라면 맛은 말해 무엇하겠나.
역시 이른 아침부터 까마귀들이 우리를 깨웠다. 이 곳의 주인은 저 까마귀들이다. 그래서 빨리 짐을 싸 나가라고 아침부터 저렇게 우나보다.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빠르게 채비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여도 제주의 버스는 느긋하다. 특히 한라산 인근을 가로지르는 버스는 어디를 가던 긴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는 느린 이동에 익숙해져 있다. 느릿 느릿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모슬포항 근처에 도착한 우리는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밀면으로 점심을 하고 차도 한 잔 마시며 잠시 쉬었다. 그리곤 운진항으로 걸었다.다음 행선지는 가파도. 제주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다. 내심 기대하던 곳이었던지라 배에 오르니 그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올랐다.
가파도는 뭍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섬이었다. 십여분 배를 타면 금새 섬에 도착한다. 우리는 배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오늘 하루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