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대하던 가파도에 들어가는 날, 항구 근처의 밀면집에서 가볍게 배를 채웠다. 가파도는 제주의 서남쪽에 있는 운진항에서 출발한다. 섬이 발치에 있어 항구에서 육안으로도 크게 들여다보이는 아주가까운 섬이다. 운진항을 향해 걷는 길도 아름답더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바다는 아니었지만 제주 특유의 까만 돌과 푸르른 바닷물의 대비가 눈길을 끌었다.
배에 올라 가파도로 들어갔다. 가파도까지는 10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마지막 배로 가파도에 들어갔는데 당일치기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 안에 섬을 둘러보고 제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계셨다.
가파도는 한 바퀴 도는데 걸음으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작은 섬이다. 우리는 가파도의 유일한 야영장 태봉왓을 예약해 두었다. 야영장으로 곧장 가서 텐트를 치고 섬을 둘러볼 심산이었다.태봉왓 야영장은 데크자리와 노지 야영지로 나뉘어있다. 데크자리에서는 마라도가 마주 보이고 노지에서는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한라산을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한라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구름이 잔뜩 껴서 아무리 기다려도 한라산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제주의 풍경을 마주하는 일에는 날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섬을 둘러보러 나왔다. 가파도는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공기로 가득해 걷는 즐거움이 있었다. 4시,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나면 섬에 사람이 없다. 막차 시간이 지난 섬에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텅 빈 가파도를 섬의 주인이 된 양 헤집고 다녔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납작한 섬이라고 한다. 섬 전체가 푸르름을 얕게 펴 바른 듯 바다 곁에 납작이 엎드린 모양새이다. 오르막이나 언덕이 거의 없어 걷기에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며 섬의 면면들을 눈에 담았다.
우리는 섬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돈 뒤 수풀로 난 샛길로 들어섰다. 이미 수확이 끝난 청보리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해 동안 푸르름을 발하던 그 밭은 이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햇살을 받아 그 빛깔은 더욱 환해졌다. 조용한 섬, 단출한 풍경을 앞에 두니 우리 모두 생각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게 되더라.
우리는 텐트로 돌아와 저녁을 막 먹은 참이었다. 뒤를 돌아본 그는 눈이 동그래졌다. 노을이 너무 아름답게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높은 곳, 아까 갔던 전망대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해는 우리 맘도 모르고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건물에 가려져 붉은 기운만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달렸다. 숨이 차게 내달렸다. 건물 사이로 해가 보였다 가려졌다 하였다. 드디어 전망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벌써 삼분지 일이 사라진 해를 마주했다. 그리고 해가 바다 뒤로 숨는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 손톱만큼 남은 해마저 사라지고 우리는 달려온 길을 따라 걸었다. 생각보다 먼 길을 달려왔더라. 재밌었다. 그저 해보러 가는 길이 이리도 재밌을 일인가 싶었다.
아침이 밝아 텐트 밖으로 나오자 드디어 한라산이 보였다. 하늘에 한라산이 그려내는 좌우로 가로지른 선이 아름다웠다. 매끈한 산의 모습이 독특했다. 제주에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한라의 전체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파도에 들어왔기에 볼 수 있었던 그림이 아닐까. 한 걸음 떨어져 제주를 보는 경험이 좋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제주로 돌아왔다. 오늘은 서귀포 숙소에서 묵을 계획이지만 이동하기 전에 드릴 곳이 있었다. 우리는 돌고래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지난번 제주에 왔을 때 이미 한 번 돌고래를 만나본 적이 있다. 우리는 그 장관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돌고래들은 노을해안로 인근 연안을 떼 지어 오간다. 그들을 다시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들떴다.
우리는 해안에 의자를 펴고 앉아 돌고래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별이 없어 자리를 옮겨보았다. 그렇게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기다린 지 거의 한 시간이 되어 갈 때쯤, 드디어 만났다. 돌고래 가족이 우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가파도에 들어가는 항구로 향하는 길에 돌고래 관광선박에 관한 홍보들을 보았다. 노을해안로 인근에 사는 제주남방큰돌고래들은 이 관광선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서거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선박들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 해안가에서도 충분히 돌고래를 마주하고 인사 나눌 수 있다. 이곳이 제주남방큰돌고래들이 오래도록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