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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Feb 05. 2024

네스프레소에 대체된 에스프레소

성공스토리 - 일상

대변항이 보이는 창가 자리가 남아 있다.  

일요일이면 북적대는 사람들로 자리 잡기도 힘든 핫플레이스.

커피와 케이크로 대화를 만드는 평일의 사람들로 제법 채워져 있다.

카페를 가는 날 아침은 집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마실 최소한의 준비다.


봄방학에 아이들과 여행을 갈까?

어디가 좋을까?

휴양으로 베트남이 어때?

가서 마사지도 받고, 푸짐하게 해산물 요리도 먹고.

편하게 후쿠오카를 다녀올까?

아이들은 제주도 가고 싶다는데, 자기 생각은 어때?

스마트폰으로 가능한 날짜의 항공권을 검색해 본다.


점심은 뭘 먹을까?

일광에 해물칼국수 맛있던데.

오늘은 면은 별로 안 댕기네.

시원하게 동치미국수 어때?

아! 이것도 면이네.


백화점에 옷수선  맡긴 거 찾으러 가야 되는데.

그건 평일에 혼자 다녀와.

날씨도 좋은데 백화점에 갇히긴 싫어.


주제 없이 나누는 일상의 편한 대화들.

카페를 나서며 원두 한 봉지를 집어든다.

오렌지색 박스의 글렌그란트 싱글몰트 위스키를 카트에 넣으며, 맛과 향을 마주할 밤을 기다리듯,

원두를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려마실 내일의 아침에 설렌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에스프레소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었다.


뒤처리가 귀찮고, 5분도 바쁜 아침은 파드 커피로 대체되었다.

포장을 뜯어 기기에 넣고 내리면 간편하게 한잔 마실 수 있다.

미디엄도 다크도 무난한 맛의 일리커피.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 킴보는 나폴리와 아라비카를 번갈아 가며 마신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환하게 웃고 있는 루카페의 1개 2천 원 하는 블루마운틴은 행복 속의 작은 사치.

앞면 포장이 흰색으로 깔끔하게 바뀐 무세띠는 남들도 다 알지만 나만 가치를 알았을 거란 귀여운 착각.


다양한 파드 커피


시계추처럼 일정하게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던 조각들이 시간을 늘려보면 눈치채지 못하게 바뀌어있다.

소금치약은 클로즈업 박하향으로.

르네휘테르 샴푸는 올리브영의 닥터포 샴푸로.

불편해서 의도적으로 바꾸었거나, 누군가 바꾸어 놓았지만 원래로 돌릴 생각을 안 했거나.

오늘 아침에 알았다.

나는 이제 원두를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리지도, 파트커피를 마시지도 않는다.

파드커피를 담던 에스프레소잔에 네스프레소로 내린 커피가 담겨있다.


솔직히 모르지 않았다.

굳이 애써 외면했다고 인정하자.


캡슐 기기 잔


출근 전 야채주스와 함께 놓인 에스프레소 한잔.

원두도 파드도 아닌 네스프레소.

수십 종류의 캡슐에서 취향에 맞는 커피를 고른다.

박스를 뜯어 상자에 여러 종류를 담아 놓지만, 대배분 빨간 나폴리 캡슐로 손이 간다.

새로 나온 캡슐이라고 아내가 권하는 커피를 내려보지만, 바닐라 향이 강해 내 취향은 아니다.


대체되지 않은 일상의 조각은 삭제되기도 한다.

사람과의 인연이든 일상의 행위이든 삭제의 공간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다.

기존의 대체이거나,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늦은 밤 술잔을 부딪히며 서로 배신하지 말자던 맹세를 했던 후배의 전화번호는 이미 삭제되고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 머리는 원장님만 할 수 있다던 약속은 집 앞 미용실로 대체되었다.


원두가 파드로, 파드가 캡슐로 대체된 이유는 편리함이다.

에스프레소에 대한 글을 쓰면서 10년 전 향수에 젖어 마음이 아련했지만, 그 감상조차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같다. 

동심에 호소하는 토이스토리의 보안관 인형처럼, 에스프레소도 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냈을까?


현재로 가득 채워진 일상에 불편한 과거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들어오려면 현재가 불편해야 할 텐데, 오히려 편리한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겠지.

과거는 대부분 이기지 못한다.

나를 채웠던 일상 중에 잊어버린 소중함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상 대신, 대체된 현실에 더 애착을 가진다.

굳이 생각을 끄집어내 찾고 싶지 않고,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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