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돌이 Jan 17. 2024

지리산 일출 - 3대가 복을 쌓아야 본다는

성공스토리 - 일상

1998년은 이런 해였다.


개원한 친구들은 내 급여보다 몇 배나 많은 매출 이야기를 한다.

동기들 대부분 결혼을 했다.

여자친구가 없다.

매일 저녁 퇴근해 엄마가 차려준 밥을 꼬박 챙겨 먹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밤늦게까지 남아 자료 정리를 하고 퇴근했다.


해가 바뀌면 1999년.

12월 30일 낮에 평소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지리산 일출을 보자.


주말에 가끔 직장 동료들과 산악회를 따라 등산을 다녔다.

혼자 금정산 범어사 쪽으로 왕복 2시간 등산을 하기도 했다.

집 앞 개울가에서 재미 삼아 첨벙거리다 바다로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지리산에 올라 일출을 보고 오면 삶의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은 느낌.

기대, 바람, 소망.


신문을 펼쳤다. 지리산 일출을 준비한 산악회가 꽤 많았다. 대충 한 곳을 골라 연락했다. 

31일 저녁 9시까지 부산시민회관 앞으로 오란다. 

준비물은 아이젠, 손전등, 물, 밥, 간식, 든든한 옷차림.

"엄마! 나 내일 밤에 지리산 일출 보러 가요."


31일 저녁 9시 시민회관 앞에는 수십대의 관광버스가 있었다.

신청한 산악회의 버스에 올랐다.


멍하게 바깥을 보다가 잠을 자다가 12시 30분쯤 지리산 어딘가의 커다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말 산악회처럼 누군가 인솔해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주섬주섬 내리더니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정상에 올라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버스에 타면 된단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산을 오르다 보니, 앞사람 꽁무니만 졸졸 따라가면 될듯하다.


6시간의 산행.

진작에 불이 꺼진 손전등.

꽁꽁 얼어 뻣뻣해진 양말 속 발가락.

누군지 모르는 한 무리를 놓칠세라 바짝 붙어 한겨울 영하의 지리산을 오른다.

몇 시나 되었을까?

절반은 올랐나?

집, 직장, 주식, 공부, 살면서 거쳐간 수백 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젓는다.

얼마나 흘렀을까?

멍하니 앞사람만 따르며, 육체적 고통조차 귀찮아지면서 머리는 텅 비워졌다.


6시 30분.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자리가 드문드문 남아 있다.

일출까지 1시간가량 남았다고 한다.

몸을 바짝 웅크리고 앉았다. 

탁 트인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찬바람 때문에 산을 오를 때보다 몇 배나 추웠다.

지리산 정상의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새해 첫날부터 굳이 일출 보겠다고 사서 고생을 하다니.

앉아 있는 뒤로 사람들이 한 층 씩 채워졌다.

더더욱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


어둑한 새벽이 조금씩 밝아진다.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지평선 끝 빨간빛 한 오라기가 지상의 어둠을 집어삼킨다.

마지막 한 점마저 삼킨 붉은 덩어리가 떠오르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와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눈물이 흘렀다.

오르길 정말 잘했구나.



오를 때보다 더 생각 없음으로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잠시도 쉬지 않고 내려왔건만 산악회 회원들 몇은 벌써 도착해 김밥을 먹고 있다.

같이 먹자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자리에 앉아 잠을 청했다.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저는 세 번째인데 드디어 일출을 봤네요."

"그래요? 나는 다섯 번 만에 봤어요."

"올해 일출이 10년 만에 처음이라던데."

"지리산 일출은 삼대가 복을 쌓아야 볼 수 있데요."

그렇구나.

나는 오늘 대단한 걸 봤구나.




1999년 아내를 만났다.

2000년 결혼을 했다.

2001년 개업을 했다.


작가의 이전글 세 번째 책 탐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