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문득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by 골드펜

5.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집 앞에 바다와 접한 산책로가 있다.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분.

집에서 산책로까지 왕복 20분.

세 바퀴를 돌면 대략 50분이 된다.


그때의 나는 답답했다.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고,

잠을 자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 체력이 야속했다.


머릿속은

과거의 선택과,

현실의 답답함과,

미래의 암울함으로 꽉 차 터질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싶어 걷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의 걸음은 몸이 유난히 무거웠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었다.

일주일은 한달이, 그리고 일년이 되었다.


소화 기능이 나아졌고,

수면의 질이 개선되었다.

똑같기만 하던 하루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땅을 디딜 때 발끝으로 전해지는 감각,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혼자 걷는 이,
달리는 이,
부모와 함께 걷는 이,
연인과,
반려견과,
유모차를 밀며 걷는 사람들.


일찍 피어난 동백꽃,
산책로 밖에서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환하게 떠 있는 달을 잠시 올려다보는 사람들.

미처 치우지 못한 산책로 위의 낙엽,
매서운 추위에 텅 비어 있는 길.


걷기는 단순하다.

별다른 도구도 필요 없고, 거창한 계획도 필요 없다.

그저 한 발을 내딛고,

다시 그다음 발을 내딛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주는 힘이 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몸은 저절로 리듬을 찾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그 리듬 속에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불안과 잡음이 조금씩 자리를 비운다.

마음이 복잡할수록 오히려 단순한 걸음이 도움이 된다.


생각을 정리하려 애쓸수록 생각은 더 엉키지만,
걷는 동안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머리로만 변하려 하면 쉽게 지친다.
결심은 오래가지 못하고, 계획은 자주 흔들린다.

하지만 몸을 먼저 움직이면 현실은 달라진다.


걷는 동안에는 생각을 억지로 바꿀 필요가 없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온다.

단순한 행위가 복잡한 마음을 풀어주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조그만 감탄이 피어난다.


아,
아직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결이 달라진다.

걷기는 이런 ‘문득의 순간’을 선물한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선명하게 남는 순간들이다.


물론 걷는다고 해서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고,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짧은 걸음 속에서
삶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려준다.

정체된 것 같던 하루에도 흐름이 있다는 것을.


어제와 오늘이 아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다름 아닌 내 두 발이다.


걷다가 문득,
삶이 조금은 견딜 만해 보인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최소한 멈춰 있지는 않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아주 조용한 신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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