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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Dec 26. 2021

만년필 어느새  일곱 자루

비싸고 불편한 필기구 만년필 이야기

막내 삼촌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하회탈을 쓴 듯 싱글벙글. 조카 사랑이 각별하셨는데, 나에게 특별히 잘해 주셨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용돈과 함께 영어사전과 책을 선물 받았다. 기억나는 또 하나의 특별 선물 파카 만년필. 당시 보급형은 컨버터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일체형이었다. 유행하던 잉크 색깔은 스카이 블루. 

친구들과 TV 연예인 누가 좋은지 떠들며 지내던 중학생에게 매번 잉크를 넣고, 세척해야 하는 만년필은 잠시 쓰다 지나치는 호기심 정도였다. 게다가 몇 번 떨어뜨려 깨졌는지 손에 잉크도 자꾸 묻어나고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졌다.


대학 졸업 후 개인 한의원에서 페이 생활을 하던 시절. 어머니 연세 정도의 환자분. 매번 이런저런 하소연도 들어주고, 정성 어린 치료에 감사하다며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다. 그때 결혼을 했고, 한의원을 퇴사하기로 한 여러 이벤트가 겹쳐 선물하신 걸로 기억된다. 

앞으로 개원하고 크게 되실 텐데, 좋은 만년필로 사인하라며 주신 만년필이 몽블랑이었다. 컴퓨터가 한창 대중화되면서, 한글, 엑셀, 로터스 123에 재미를 붙이던 때여서, 비싼 몽블랑은 별로 쓸 일이 없었다.

컨버터가 있어 이전의 일체형보다는 편했지만, 병에서 잉크를 뽑고, 오랜 시간 쓰지 않으면 잉크가 막히거나 말라 버린 잉크를 세척하는 일은 귀찮았다.


낮의 낙서를 도와주는 파카 SONNET 무광 블랙


해외여행의 시작은 면세점. 젊을 때라 멋도 많이 부리던 때고, 명품에 관심도 많아 롯데면세점이랑 지금은 없어진 파라다이스면세점에서 발리 구두, 몽블랑 벨트, 던힐이나 제냐 셔츠 등을 둘러보곤 했다. 

어? 이게 뭐지? 몽블랑 매장의 만년필을 구경하는데 끼워서 쓰고 버리는 잉크가 있다. 병 잉크보다 훨씬 편리해 보였고, 처음으로 카트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몰스킨에 흠뻑 빠져있던 때라 몽블랑 만년필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촉감 좋은 몰스킨의 흰 여백에 몽블랑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재미가 톡톡했다.


생일선물로 아내에게 파버카스텔을 사달라고 했고, 생일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인 친구에게는 파카 만년필을 요구했다.  


그러다 몰스킨 낙서와 함께 같이 식어버린 만년필 사랑. 가끔 꺼내 쓰다 보니 잉크가 말랐는지 잘 안 나온다. 물을 묻히고, 침을 바르고, 세척을 해도 끊어져 나오는 글씨. 몇 번 그렇게  쓰다 보니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만년필을 꺼내본다. 진료 관련 아이디어 메모, 책을 읽다 좋은 글귀 옮겨 적기, 주식 관련 공부, 블로그 콘텐츠 모아두기를 하다 보니 노트가 다시 편해졌다. 

정성껏 세척하고 카트리지를 끼운다. 빈종이에 동그라미를 무한으로 그려가며 잉크를 기다린다. 하지만 몽블랑은 답이 없다. 20년이 넘어 수명이 다되었다 보다. 큰맘 먹고 내 돈으로 몽블랑을 하나 질렀다.


나랑 만년필이 잘 안 맞나? 새로 산 몽블랑이 말썽이다. 한번 떨어뜨린 기억이 난다. 그때 문제가 생겼는지. 결국 수리를 맡겼다. 거금 9만 5천 원이 나갔다. 


최근 가지게 된 좋은 취미 낙서. 당연히 몽블랑을 자주 꺼내게 된다. 분명 수리를 했는데, 처음 1주일 잘 나오다 다시 안 나온다. 물을 묻히고, 침을 바르고, 세척을 한다. 빈종이에 무한으로 동그라미 그리기.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거금 50만 원. 병원에서 쓰는 파카는 며칠 안 썼다 써도 잘만 써지는데 몽블랑은 대체. 

굳이 만년필로 낙서를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참다 참다 워터맨을 샀다. 필기감 완전 최고! 얼음판을 지치듯 흰 노트에 시원스러운 글씨를 써나간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워터맨/ 몽블랑/ 라미


50만 원짜리 애물단지 몽블랑을 한 번씩 꺼내 본다. 물, 침, 동그라미를 반복하지만 여전히 글씨가 끊어진다. 참다 참다 다시 몽블랑 매장으로 갔다. 직원이 커다란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어? 집에서 보다 끊김 없이 잘 써지는 듯싶더니 중간중간 끊김이 나타난다. 

간혹 카트리지가 오래되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카트리지 수명은요? 2년 정도입니다. 그럼 카트리지 한 세트 주세요. 카트리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니, 제가 새 거 1개를 드릴 테니 가져가 써보시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와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있던 카트리지를 빼고 매장에서 받은 걸로 툭 끼워 넣었다. 동그라미를 몇 개 그리는데 쭉쭉 끊김 없이 나온다. F촉의 굵은 글씨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카트리지를 빼서 파버카스텔에도 끼워본다. 동그라미를 몇 개 그리고, 살짝 침을 발랐더니 시원스럽게 글씨가 써진다. 몇 년, 특히 최근 몇 달간 비싼 필기구 만년필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날아간다.


쇼핑몰을 검색해 색깔별로 카트리지를 샀다. 유통기한 때문에 너무 많지 않게 조심하면서. 


20대 때 받았던 몽블랑은 그럼? 수명이 다된 것도,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거잖아? 오래된 카트리지 때문에 글씨 끊김이 생긴 거잖아? 집안 구석구석 있을만한 곳을 뒤졌다. 필기구 모아둔 바구니, 책장 근처 케이스. 없다. 버렸나? 그 비싼 걸 버렸을 리는 없을 텐데. 꼭 다시 찾아 명예 회복을 시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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