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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May 07. 2022

세상에 쉬운 노래는 없다

보컬 트레이닝 - 선곡

"발라드 좋아한다 하셨죠? 김연우 '사랑한다는 흔한 말' 할 테니까 연습해 오시고, 악보 준비하세요."

보컬의 신 김연우. 방송에 나와서 자신도 부르기 힘들다고 말한 세곡 중 한곡. 

"열심히 연습해 오겠습니다."

연우는 벌써부터 흥분되었다. 후다닥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악보 사이트에 접속해 악보를 구입하고 출력했다.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차에서 흥얼거리며 들을 때와 사뭇 달랐다. 악보를 보며 들으니 평소 알던 음정, 박자와 조금씩 달랐다. 김연우가 어떻게 부르는지 꼼꼼히 체크해가며 듣고 연습하고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은 이 정도로 하시고요. 다음 주부터 김범수 '끝사랑' 할 테니까 연습해 오세요."

한곡으로 3주 정도 수업했다. 노래를 연습해 오면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부르고, 모자란 부분을 체크받았다.  체크받은 부분을 충분히 보충해 연습해 와야 했다. 수업은 숙제 검사를 받는 시간이었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 아직 제대로 못하는데..."

"지금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아직은 노래 한곡을 제대로 할 실력이 안되니까 다양한 가수들 노래를 불러보면서 특색도 파악하고, 발라드라는 장르를 어떻게 부르는지 배워가는 과정이세요."

"그럼 김범수는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3대 보컬인데요."

"잘할 거라 기대 안 해요. 할 수 있을 만큼만 해와 보세요."

선생님은 김범수를 보컬의 교과서라고 하셨다. 끝사랑은 모르는 노래라 음정과 박자부터 익혀야 했다. 수업 때 배운 발성도 해보고, 악보를 보며 MR을 틀고 연습했다. 


선생님이 표시해준 악보


"처음 '내가'는 발음을 끊지 마시고 '내애가'로 부드럽게!"
"여기 '이렇게'는 셋잇단음표 잖아요. '이이렇게'가 아니라 '이렇게'로."
"앞의 '내가'와 지금의 '아무'는 박자가 틀리잖아요."
"참고 있는 날은 '있는'이 아니라 '있느은'이라고 악보에 나와 있네요."

음대 성악과 출신인 선생님의 목소리는 연습실을 꽉 채울 만큼 컸다. 연습을 해왔는데 첫 소절부터 지적을 당했다. 선생님은 음표 하나, 박자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연우는 작아져만 갔다. 

지적받은 부분을 연습해 오면 또 다른 부분을 지적받았다. 가수와 한끝차라 생각했었는데, 밑으로 밑으로 계속 계단이 생겼다. 이제는 백 칸쯤 밑이다. 

"전공생들한테는 이렇게 지적도 안 해요."

주눅이 들어 없던 실력도 달아날 판이다. 


"끝사랑은 이 정도로 하시고요. 발라드만 하기 지겨우시죠? 대부분 보컬 학원에서 꼭 하는 곡이 있는데. 김건모 서울의 달 아세요?"

"드라마 서울의 달은 압니다."

"서울의 달은 대표적인 블루스 곡이에요. 김건모 특유의 소울도 잘 살리셔야 되고, 특히 1절 끝나고 나오는 스캣 부분을 잘 연습해 오셔야 해요."

선생님은 음원 사이트에서 노래를 찾아 틀었다. 연우는 들어본 적 없는 노래다. 스캣인지 따다빠라바하는 추임새 부분이 거슬렸다. 지금껏 알던 댄스풍의 김건모 노래와 달리, 서정적인 가사도 오글거렸다.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 노래가 아닌데요."

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노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럼 좋아하는 노래만 하실 거예요? 가수라면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어야죠."

"선생님! 저는 가수가 아니라 그냥 취미로..."

"취미면 대충 해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회원님 너무 잘하세요. 실력이 부쩍부쩍 늘고 있어요. 제가 많은 회원님을 만나봤지만 회원님은 정말 재능이 있으세요라는 학원과는 달랐다. 몇 주 안 겪었지만 선생님의 혹독한 수업방식을 알면서도 연우는 순간 울컥해서 대들었다가 기나긴 훈계를 들어야 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취미반도 선생님에게는 제자다. 


"연습할 시간이 없다 하셨죠?"
"아무래도 집에 아이들도 있고. 마치고 올라와 연습하려니 너무 늦기도 하고."
"연습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점심시간에 올라와서 연습하세요. 대신 문단속은 철저히 하시고요."


서울의 달 수업은 몇 번 못하고 끝났다. 스캣 부분은 흉내도 내기 힘들었다. 

"노래들이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그럼 다음 곡은 선생님이 고르시겠어요?"

"사실은 준비한 곡이 있어요. 악보 뽑아서 틈틈이 연습도 했고요."

"정말요? 어떤 노래예요?"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현빈이 부른 '그 남자'요."
"오오. 지금 한번 해 보실래요?"
"아뇨. 그 정돈 아니고. 그냥 몇 번 불러봤어요. 다음 수업시간에 할게요."

연우가 그 남자를 고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현빈. 현빈은 가수가 아니다. 최소한 현빈보다는 잘 부를 자신이 있었다.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었고, 감정도 잘 살릴 자신이 있었다.  

"그럼 다음 수업은 '그 남자'로 할게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연우는 백지영의 그 여자로 연습했다. 선생님은 첫 소절부터 지적을 하신다. 첫 소절은 무한 반복해 가며 들었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 백지영의 발음 하나 놓치지 않고 듣고, 악보에 메모해가며 연습했다.


드디어 수업 날이 되었다. 

수업은 노래부터 하지 않는다. 선생님과 가볍게 목을 풀고 발성부터 시작한다. 

"자 시작할게요. 아로 할게요."
선생님이 건반으로 도미솔미도를 치면 아아아아아를 반음씩 높여간다. 

"이번에는 에로 할게요."

에에에에에

"입을 더 크게 벌리시고요. 이번에는 이로 해볼게요."

이이이이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 왜 소리가 작아져요. 음정 유지하고."

이이이이이

"이이이에서 지금 이미 고음이잖아요. 그럼 거기에 맞춰 호흡을 미리 준비해야죠. 다시"

이이이이이


수영 강습에서 제일 지겨운 시간은 몸풀기 시간. 재즈댄스 학원에서 제일 지겨운 시간은 몸풀기 시간. 킥복싱 학원에서 제일 지겨운 시간은 몸풀기 시간. 실용음악 학원에서 제일 지겨운 시간은 목 풀기 시간.

"발성은 평생 하셔야 해요. 점심시간에 연습하러 올라와서도 바로 노래부터 하지 마시고, 건반 눌러가며 발성부터 하고 노래를 해야 성대가 안 다쳐요."


"그 남자 연습해 오셨죠? 바로 시작해 볼게요."

선생님은 악보를 보며 반주를 시작했다. 연우는 반주에 맞춰 호흡을 맞춰 나갔다.

음정, 박자 안 틀리게 준비했고, 백지영의 숨소리까지 따라 하며 연습했다. 드디어 실력을 인정받고,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할 시간이다.


"한 남자가 그. 대. 를. 사랑합. 니. 다."

전국 노래자랑에서 자신감 충만한 도전자의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땡 하는 실로폰 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은 폭소한다. 가수 협회에서 지금껏 뭘 했냐고 전화가 오고, 시청자 게시판은 난리가 날꺼라는 자신감에 찬 표정의 도전자였기에 땡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된다.

"노래를 왜 그렇게 부르세요?"
연우는 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연습을 많이 해오지 못했었다. 그 남자는 처음으로 제대로 연습을 해왔다. 부르면서도 자신의 노래에 만족했고, 이제는 충분히 반격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백지영이 이렇게 불렀어요."

"네? 제가 아는 백지영은 노래를 그렇게 안 부르는데요?"
"제가 헤드폰으로 계속 들었는데 이렇게 불렀어요."

"백지영이 그. 대. 를. 사랑합. 니. 다. 이렇게 끊어서 불렀다고요 발라드를?"

우겼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틀렸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듣고 연습해 왔는데 첫 소절부터 땡이라니. 분명히 백지영은 그렇게 불렀는데.


연우의 흥분에 선생님은 맞서지 않았다. 같이 백지영의 그 여자를 들었다. 이 부분은 끊어서 부르는 게 아니라 잘 들어보시면 호흡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어요. 설사 쉬는 구간이라도 쉬어서는 안돼요. 계속 호흡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해요. 지금처럼 끊어 부르시면 안 돼요.


아는 만큼 들린다. 수업이 거듭되면서 연우는 지난주, 혹은 한 달 전 수업이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들리는 선생님의 귀와 아는 만큼 들리는 연우의 귀는 달았다.


그 남자 보컬 수업은 몇 주간 계속되었고, 4주 차에는 다음 곡을 준비했다.

"다음 시간부터는 이기찬의 '또 한 번 사랑은 가고'로 할게요. 정통 발라드니까 앞선 곡처럼 어렵진 않을 거예요."
"선생님. 수업하면서 느낀 건데 쉬운 곡은 없는 거 같아요. 저는 현빈이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몰랐어요."
"현빈이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제 기준은 김연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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