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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Apr 25. 2022

에스프레소는 원액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일상의 황홀한 취미 생활 - 에스프레소

2000년 처음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예산이 빠듯했다. 아침은 민박집에서 최대한 배불리 먹었다. 점심은 퐁퓌드 광장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검고 딱딱한 바케트를 뜯었다.


2003년 두 번째 떠난 배낭여행. 로마에서 점심으로 피자 한쪽, 간혹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으면 감지덕지였다. 로마 콘도티 거리에는 노천카페가 많았다. 가격표를 보니 내일 피자 몇 쪽을 먹을 금액이었다. 


"언제 또 와보겠어. 우리도 여기서 커피 한번 마셔보자."

거리를 서성이다 마침 실외에 자리가 나서 후다닥 앉았다. 에스프레소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차비 아끼느라 종일 걸어 다니던 초라한 여행자는 로마의 햇살 아래 커피를 마시는 사치를 누렸다. 영화처럼 계산서에 돈을 올려두고 나왔다. 약간의 잔돈은 팁.


부산 광안리 해변은 중앙에서 남천동 쪽으로 먼저 건물이 들어섰다. 민락동 쪽은 아직 개발이 안된 단층 건물에 횟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다를 보며 따뜻한 차 한잔, 혹은 다양한 안주에 소주, 생맥 한잔이면 남천동 쪽으로 가야 했다. 황량한 민락동 쪽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아직은 점심 한 끼가 5천으로 해결되던 2003년. 커피 한잔 3천 원은 익숙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서서 커피를 주문하고, 옆에서 직접 받아가란다. 


"에스프레소랑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배낭여행 돌아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신 기억이 없다. 이름도 생소했고, 아직은 자판기 커피, 믹스커피가 익숙하던 시절. 벽면 메뉴판 맨 위에 에스프레소가 보였다.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은 뭔가 기분이 남다를 듯했다.


"에스프레소는 원액이라 많이 진하고 쓴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후로 가끔 스타벅스를 갈 때마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항상 같은 말을 들었다.


설탕 둘, 프림 둘에 익숙한 우리에게 아메리카노는 쓴 커피였다. 100배나 쓴 에스프레소를 시켰다가 쓴맛에 놀라 뜨거운 물을 타서 마시는 일이 흔했다. 

나는 콘도티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셔봤고,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정도는 마실 줄 안다는 말투로 에스프레소를 자연스럽게 발음해도 마찬가지였다.


"네 알고 있어요."

"저 자주 마셔요."

"왜 시킬 때마다 묻죠?"

같은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준비했다.


희고 맑은 에스프레소 잔에 한 모금하면 사라질 양의 진한 커피가 담겨 나온다. 설탕을 넣고 젖지 않은 채 바닥에 깔고 쓴맛에서 조금씩 단맛을 느껴가며 마시는 거라고 어디서 들었다. 다 마시면 바닥에는 녹지 않은 설탕이 가득 깔려있다.


에스프레소 잔에 더블로


매일 아침 야채 주스와 네스프레소로 내린 에스프레소 한잔.

출근해 파드로 내려 마시는 에스프레소.

정작 카페에서는 커피를 안 마신다. 레몬, 자몽, 카모마일을 주로 주문한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글을 쓰다 문득 궁금해졌다. 스타벅스에서 아직도 에스프레소를 마실수 있을까?

오래전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는데 잔이 없다고 머그잔에 에스프레소를 줬다. 테이크아웃을 하는데 아메리카노 종이컵에 에스프레소를 줬다. 그 후로 에스프레소는 집과 직장에서만 마셨다.

잔이 없다고 와인을 막걸리잔에 주는 곳에서 내 즐거움을 망치기 싫었다. 벽면 메뉴에 에스프레소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같이 근무하는 원장님이랑 점심을 먹고 차 한잔 하러 스타벅스로 가자고 했다. 스타벅스는 거의 큰길에 있다. 이곳은 희한하게도 골목길에 있어서 잠시 도심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차 한잔 할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 되나요?"

"당연히 되죠."

잠시 후 닉네임이 불렸고 음료를 찾으러 갔다. 


하워드 슐츠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감명받아 시작했다는데, 에스프레소가 없는 커피전문점은 좀 아니지 않나. 머그컵에 담겨 나오길 기대했다. 계절 음료 파느라 기본을 잃어버린 커피전문점, 에스프레소의 추억을 망쳐버린 내용의 글을 준비했었다. 


희고 맑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진한 커피 향의 에스프레소.

셀프코너에 설탕 대신 시럽만 있었다.


"가루 설탕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스틱도 드릴까요?"
"아뇨 스틱은 필요 없어요."

종이를 뜯어 설탕을 부었다. 




에스프레소 이야기를 듣던 지인이 에스프레소에 얽힌 웃픈 경험을 들려줬다. 


민락동 회센터에서 점심 계모임으로 회를 먹고 다 같이 스타벅스로 향했다. 점심 한 끼에 맞먹는 커피 값에 놀라, 가격표를 보고 제일 싼 커피를 주문했다. 이름도 생소한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두 잔, 카페라테 한잔, 에스프레소 한잔 주세요."

잠시 후 머그컵에 담긴 세잔의 커피. 간장 종지 만한 잔에 담긴 커피 한잔.

자신이 시킨 에스프레소만 작은 잔에 담겨 나왔고, 지인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붉어졌다. 

"제가 못생겼고 뚱뚱하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왜 저만 작은 잔에 줘요? 저도 커피 많이 마셔봤어요! 사람 차별하면 안 되죠."

"주문하신 커피는 에스프레소로써 원액이라 그렇습니다. 큰 잔이랑 뜨거운 물을 좀 드릴까요?"

"아니요. 저도 이거 마실수 있어요."

자리를 잡고 다 같이 수다를 떨며 커피를 즐겼다. 지인은 너무 썼지만 꾹 참고 마셨다. 




검은 액체 위의 황갈색 크레마.

고소한 커피 향을 100배 응축한 진한 간장 같은 코를 막고 싶은 향기

쓴 한약 같은, 입에서 뱉고 싶은, 물로 입을 헹궈내고 싶은, 삼켜도 입안에 쓴 맛이 가시지 않는 쓴맛.

한 번 두 번 그리고 목구멍으로 툭 털어 넣는 소주처럼 마시고, 소주처럼 인상이 찡그려지는.


"이런 에스프레소를 왜 마셔?"

"멋있지 않나?"




해운대역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구남로. 코로나 전에는 밤마다 버스킹과 길거리 공연이 열렸다. 겨울이면 빛 축제가, 크리스마스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엽서로 소원 트리를 꾸미는 행사가 열렸다. 

인도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구남로를 걸으면서 봐 둔 에스프레소 바가 있었다. 커피를 하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라 시간 내서 들러야겠다 점찍어 뒀다. 

벚꽃이 지기 시작한 4월 초. 아내와 해운대 바닷가를 걷고 동백섬이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계획했다. 불현듯 떠올랐다. 


"구남로에 거기로 가지 않을래?"


에스프레소 바의 에스프레소


흰 깔끔한 에스프레소 잔.

가득한 크레마.

걸쭉한 커피액.

바닥에 깔린 설탕.


20년 전 콘도티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의 맛은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장미를 보면 장미를 알아보듯, 입술에 닿은 에스프레소에서 그래 이거야라는 감촉이 살아났다. 


일상의 엑센트.

나만의 행복 이벤트.

내일 오전 날씨가 맑으면 구남로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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