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보다는 편리함
주말 처형 부부를 초대했다. 아내는 샐러드랑 파스타에 디저트를 준비했다. 디너의 하이라이트는 새로 구입한 드롱기 반자동 커피머신으로 추출한 커피였다. 원두는 카페에서 갈아뒀다. 미리 사용설명서도 공부했다.
"이제 커피 주세요."
의자에 일어나 드롱기를 공개했다. 정수기 옆에 웅장하게 앉아 시동을 기다리는 머신의 스위치를 올렸다.
"형님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뭐뭐 되는데?"
"이 머신으로 다 만들 수 있는데, 오늘은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중에서 골라주세요."
"그럼 나는 카푸치노로 해볼까?"
"처형은 뭘로 하실래요?"
"제부 편한 걸로 만들어 주세요."
"그럼 카푸치노랑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드릴게요."
사용설명서를 펼쳤다. 순서대로만 하면 카페에서 마시던 다양한 커피를 만들어 준다길래 리허설은 없었다.
컵에 우유를 따르고, 기기의 버튼을 스팀 모드로 바꾼 후 우유를 믹싱 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우유가 데워지면서 거품 가득 부풀어 올랐다.
필터에 커피를 담아 기기에 장착하고 커피 추출 버튼을 눌렀다. 압력 밥솥에서 나는 뜨거운 김이 물과 함께 터지듯 쏟아졌다. 스팀 모드를 커피 추출 모드로 다시 바꿔야 했는데 깜빡 실수했다. 커피 모드로 바꾸고 다시 버튼을 누르니 필터에서 연한 갈색의 물이 나왔다.
"이상하네..."
버튼을 눌러 추출을 중지하고 커피 맛을 봤더니 거의 맹물이었다. 제품 박스에는 기기에서 진한 갈색의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그림인데 연한 갈색이라니.
필터의 원두를 버리고, 대용량 필터로 교체하고 커피를 가득 눌러 담아 다시 추출했다. 연한 갈색의 물이 컵을 가득 채웠다. 맛은 여전히 맹물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부해서 다음에 만들어 드릴게요."
인터넷을 뒤졌다. 에스프레소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는 원두의 굵기. 드립식보다 원두를 3배 정도 곱게 갈아야 된단다. 카페에 갔더니 판매용 원두를 가는 분쇄기는 그 정도로 갈리지 않는단다.
커피 그라인더와 원두를 보관하는 용기를 샀다.
커피머신을 사무실로 옮겼다. 바쁜 아침 여유롭게 커피를 추출해 마실 여유가 없다. 사무실에서 편안히 음미하며 마시고 싶었다.
커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려면, 먼저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아둔다. 매일 갈기는 귀찮아 2~3일 정도 분량을 갈았다. 머신의 물통에 신선한 물을 채운다. 기기를 예열한다. 필터에 커피를 가득 담아 꾹 누른다. 기기에 장착하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설탕을 붓는다. 갈색액을 덮은 엷은 크리마를 보고 잠시 흐뭇해한다. 쓴맛에서 바닥의 설탕이 녹아든 단맛까지 두세 번에 걸쳐 마신다.
잔을 씻는다. 필터를 분리해 커피 가루를 씻어낸다. 필터를 분리해 잔 옆에 같이 말린다.
카페라테를 마시려면 과정이 추가된다. 머그컵과 우유를 준비한다. 스팀 모드로 우유를 부풀린다. 커피와 설탕을 넣고 저어준다. 마신 후 기기에 묻은 우유를 닦아 내고, 머크컵도 씻어 잔 옆에 같이 말린다. 남은 우유는 냉장고에 넣어둔다.
하루 서너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려면 위의 과정을 같은 횟수만큼 반복해야 한다.
"원장님? 커피 가루 세면대에 버리셨어요?"
세면대 물을 틀어 필터를 씻으면 커피 가루와 함께 편하게 씻겼다. 한두 달 흘려보낸 커피 가루가 결국 세면대를 막았나 보다.
또 다른 공정이 추가되었다.
커피 가루를 따로 모으는 비닐봉지를 준비했다. 필터의 커피 가루를 비닐봉지에 탁탁 쳐서 털어 넣는다. 세게 치면 필터가 빠져서 다시 건져내야 한다. 남은 가루는 손가락으로 닦아내서 최대한 세면대로 가루가 가지 않도록 했다. 수건으로 닦아봤는데 커피 액이 묻은 수건을 옷이랑 같이 세탁할 수 없다며 직접 빨아 쓰란다. 손가락으로 더 열심히 닦아냈다.
커피 머신 구성품 중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필터가 하나 있었다. 설명서를 보니 동그란 뭔가를 끼워 커피를 추출했다. ESE POD라는 용어가 반복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파드 커피였고, 1회용으로 편하게 원두를 추출해준단다. 당장 주문했다.
택배가 도착했고 기대에 부풀어 박스를 개봉해 기기에 장착했다. 사이즈가 안 맞다. 필터보다 훨씬 컸다. 전화를 했더니, 혹시 기기가 뭔지 묻는다.
"저희껀 소프트 파드고, 거기 설명서에 ESE POD는 하드 파드를 사서 쓰셔야 합니다. 다행히 샘플로 보내드린 것만 쓰셨으니, 물건 택배로 보내주시면 환불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기기를 예열한다. 필터에 파드를 넣고 장착. 커피를 내리고, 필터를 분리해 파드를 버린다. 과정이 심플해졌다. 몇 달 동안 원두를 갈아 마시던 에스프레소보다 3배는 진하고 맛있다. 가장자리 보일 듯 말 듯 생색만 내던 크리마가 두껍게 잔을 덮었다.
커피 그라인더와 원두 보관용기는 드립 커피를 즐기는 처형에게 드렸다.
나이 들면 닳은 무릎의 연골처럼 필터의 고무가 닳으면서 커피가 옆으로 튀었다. 단종 모델이라 바디 부분을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단다. 대신 새 기종은 원두와 파드를 같이 쓰도록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데, 필터 부분은 규격이 같아서 기존 필터를 나사를 풀어 버리고, 새 필터로 끼워 쓰면 아마 맞을 거란다. 버릴뻔한 머신을 2만 원으로 몇 년 더 쓸 수 있었다.
모터의 수명이 다하면서 머신은 더 이상 진한 갈색 커피를 내리지 못했다. 지금은 파드 추출 기능만 있는 기기를 쓰고 있다.
원두를 사서 분쇄하고, 채우고, 내리는 아날로그적 취미는 고상하고 시적이다. 스스로 멋있어 보이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대로 마시면 에스프레소.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부으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각얼음을 채우고 마시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편리함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