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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스펙타클한 줄 알았소만.

by 체리마루

다양한 책을 읽는걸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건 역시 산문집을 읽을 때다. 다른 장르를 읽을 때는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산문집을 읽을 때는 맥이 잘 끊기지 않는다. 거진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과 세세한 감정을 살펴보는 일은 너무 재밌고 좁은 내 인생을 넓혀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에 마음이 닳고 있을 때 타인의 인생으로 도망쳐 유유자적하다보면 어느 새 마음이 넓어져 있어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산문집을 읽다보니 나도 내 인생을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생각 보따리 하니까, 내 인생도 꽤나 스펙타클하니까 읽는 사람들 웃고 울릴 수 있으니까 충분히 승산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으니 이제까지는 즐겜 모드로 읽던 산문집이 다르게 보였다. 소재가 눈에 띄였다. 외국 가수가 예술 활동을 하다가 지인들과 마약을 한 얘기는... 뭐 외국 사람이고 예술가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고(진짜 그럴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냥 외국이니까 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인데 주기적으로 외국 생활을 하러나가는 사람이 소재가 많은 것까지도 겸허히 수용하겠다. 근데 일반적으로 직장생활하는 한국인인데 친구들과 즐겁게 데킬라를 마시고 만취해 문에 박아 앞니 네 개가 부러졌고 그 부러진 앞니들에게 애칭을 붙여줬다는 얘기는 너무 압도적이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기분 좋게 만취해서는 아파트 입구에 누워서 토할 것 같은 속을 달래던 일 따위는 금방 고리타분해져 버린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괜찮아요?"라고 물어봤지만 이 와중에 경계한다고 "괜찮으니까 그냥 가셔도 돼요"라고 나눴던 대화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앞니 네 개 선에서 내 소재는 이미 노잼인 것이다. 이건 반칙이다.

주변에서는 날 보고 세상에서 제일 재밌니 감정기복이 크고 인생이 스펙타클하니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초록동색이고 유유상종이라 나를 포함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정하는 기준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산 온실 속 화초들이다. 그 온실이 크고 작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온실에서 얌전하게 자랐고 나는 그 온실에서 조금 요란할 뿐이다. 압도적인 소재 앞에서 혀를 내두른 나는 새로운 전략을 짰다. 내 소재는 평범하나 그 소재를 대하는 내 생각이 비범하니 이 생각으로 글을 써보겠다고.

나는 한 생각을 하면 "끝까지 간다". 수평과 수직의 끝까지 간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이고 갈 수 있는 극단까지 간다.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해서 관찰력이 좋은 편인데, 여기에 상상력까지 좋아서 생긴 생각 습관이다.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 때문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측하거나 추리해서 맞춘 적이 몇 번 있었다.(스스로도 신기하긴 했다. 정말 아무도 예측못할만한 일들이어서.) 그 까닭에 주변에서 검사나 수사관하라는 얘기도 종종 듣곤 했는데, 그때는 당연히 내가 하는 생각이 워낙 많으니 그 중에 몇 가지 맞을 때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넘겼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 직업들을 가졌다면 적성이라 즐겁게 일했을 것 같긴 하다.

검사나 수사관으로 일했다면 쓸 수 있는 산문 소재가 훨씬 더 많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얌전하게 평범한 회사의 일반적인 사무직으로 직업을 얻었다. 정해진 절차와 규칙에 따라 수행하면 되는 일이었고 일적으로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쓸 일이 없었다. 어디나 그렇듯 사람을 상대하는게 지쳐서 그렇지. 남아도는 정신적 에너지는 자신이 쓰일 곳을 열심히 찾아다녔고 이럴 때 몰입할만한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하면 으레 엉뚱한 곳으로 가듯이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생각들에 붙어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인류학 박사가 되기에 이르자 덧없음과 허무함이 밀려왔다. 30년을 넘게 살고 드디어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늘 새로운 경험과 만남이 필요하다. 도파민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도파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필요한 도파민에 비해 너무 안전제일주의로 살았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연애에 열중하느라 교환 학생도 안 가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싫다고 클럽도 안 가고, 연애를 시작할 때도 너무 많이 재고 따지고, 취업에 도움될까봐 배우고 싶었던 연극영화과 복수전공 대신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선택하고.... 이러한 선택들은 안전제일주의인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택이다. 근면성실해서 금융투자도 부채도 별로 안 만들고 오로지 근로소득만으로 재산을 축적한 우리 엄마아빠. (그리고 그 방법이 통했기 때문에 안전제일주의는 여전히 굳건하다.) 그 온실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자란 내가 이제와서 부모님 때문에 도파민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탓하기엔 사람이 좀 없어보이니까 그 탓을 하면 안되지만 여튼 사실이 그렇다.

어렸을 때 꿈은 뮤지컬배우나 PD 등등 여튼 방송계로 진출하는 거였는데, '니같이 여린 게 거신 방송가에서 어데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는 부모님의 노기어린 걱정에 그 이후로는 그 쪽은 딱히 생각안해봤다. 근데 인디언 속담에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고 했다. 사람은 지금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했더라도 살면서 한 번은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한다. 대학교 때 연극영화과 복수전공을 하려 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을지도? 결국 경영학과를 선택하긴 했다만. 지금 내 추구미는 침착맨이다. 침착맨이 딱히 대단한 액티비티를 하는건 아니지만 그는 하나의 일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해낸다. 침착맨 삼국지, 진격의 거인 감상회 등 그가 관심있는 소재에 대해서 자유로이 추측하고 말하는 걸 사람들이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질투난다. 침착맨을 롤모델로 추구하다보면 언젠가는 비슷하게라도 도달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니까. 내 인생이 대단하게 스펙타클한 편은 아니어도 내 생각은 스펙타클하니까. 언젠가는 내가 방송에 나올테니 한 컷이 나오더라도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언제든 긴장을 놓지 않고 관리해야겠다. 주기적으로 미용실도 가고, 속눈썸펌도 하고, 언제 섭외가 되어도 나갈 수 있게 계절별로 깔롱직이는 옷을 한 세트씩 마련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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