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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냥 Feb 19. 2017

적당한 거리, 어디 쯤에서 만날까요?

12월의 월요일 : 거리


12.05.


어른이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거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너무 다가가면 아픈 일이 생겼고 너무 떨어지면 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장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겨우 떠올린 건 상대를 존경할 만한 적장처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까워지면 속을 모조리 내보여버리는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한, 친애하는 적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中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中


적당한 거리를 찾는다.


당신을 만나고 싶은 거리,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

어디에 있을지, 어느 정도 인지.


숱한 흔들림 가운데 때때로 그 거리를 찾고, 되묻는다.

우린 뭔지,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긴 진짜 어디인지.




12.12.


1.

서촌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향해 가는 한적한 거리를 좋아했다. 어느 가을날쯤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떠한 이유로 그 길을 홀로 걸어가는데, 그 길에 서있는 나무며 돌담이며 작은 꽃 모두 나의 벗과 같았다. 허전한 길을 꾸미기 위한 존재가 아니었고, 오히려 희한한 든든함을 느꼈다. '어딘가 걷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되었다. 그 길은 내게 혼자 걸어도 혼자가 아닌 길이자, 꿈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길이자, 사람들 곁보다 더 따뜻한 길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그 길에서 그 느낌을 받기 어려워졌지만,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좋다.


2.

걸음의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거리의 풍경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진다. 저벅저벅 내 발걸음 소리와 쓸쓸한 풍경이 내뿜는 우중충함이 뒤섞여 습한 공기를 만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고, 이를 반복한다.


이미 지나온 길이 왜 자꾸만 저 앞에 있는 것 같지.



12.19.


암수 서로 정답구나.


로맨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나, 최근 재밌게 본 '라라랜드'나 그 사이의 숱한 로맨스 영화에서 꽂혔던 장면은 '거리를 걷는 연인'의 모습이다. 거리를 걷고, 서로를 이야기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연인들. 데이트의 필수 요소이지만, 쉽지 않은 장면이기도 하니까.




12.26.


걸어요. 걸어갈 거예요. 걷고 있어요.

그 먼 나라에서 우리 볼 수 있으면 만나요.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산책도 해요.

오늘은 마치 몇 해 전, 어느 날 눈물 바람에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아침의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 것 같아요. 난 괜찮아요. 그 날 이후로도 행복한 날들이 많았으니, 오늘과 같은 날들이 한동안 이어져도 행복한 날들이 곧 찾아올 테니까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에요. 난 지금 꿈속에 있어요. 꿈은 깨면 그만이니, 난 꿈속을 걷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믿으면 돼요.

- 눈물 바람에 정신없던, 2017년 12월 26일


처음으로 울었다. 창피한 것보다 깊은 아픔이 컸고, 흘린 눈물보다 참은 눈물이 많았다. 이제 우린 저 먼 나라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먼저 발걸음을 떼었고, 나는 처음으로 미래의 내가 할 작별인사가 가까이에 있음을 체감했다. 그러면서도 눈에 밟히는 사람들로 일단 마음을 달래 보았다. 지금 내겐 마음 아픈 일이니 최후의 수단이자 최악의 결말이라 부르고 있는 이 길을 부정하고 싶지만, 언젠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마음을 살살 달래고 있는 날 발견한다. 붉어진 눈가를 알아차렸는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와 나를 '톡톡' 건드려보고 가는 사람이, 그 마음이 눈에 밟힌다. 나는 또 마음을 달래 본다.


달래고 달래며 걷고 있는 이 마음이, 주변을 둘러볼 사이도 없이 언제 어디로 튀어버릴지 몰라서 불안하다. 사고는 치지 않을지, 약한 마음이 더욱 꽁꽁 얼어버리진 않을지. 다들 말려도 마냥 사랑하고 싶었는데, 꿈꾸고 싶었는데...


'그리 그대로, 좋았던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 언젠가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을 몇 번씩 되뇌며, 마음을 다잡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사랑했던 순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고, 그것으로 나는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을 거고,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테고, 언제가 가게 될 먼 나라에서도 그 순간들은 언제나 따뜻할 테고.



월간 4X5 <다섯 개의 단어, 스무 번의 시>는 한 달 동안 다섯 개의 단어, 각 단어 당 네 번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짧고 주기적인 생각, 무질서한 개인의 감정과 사유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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