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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냥 Feb 13. 2017

그대로 멈춰서, 그대로 멈춰 서.

11월의 금요일 : 버티다



11.04.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에 대하여> 中


버텨야 할 것 하나 없는 하루를 꿈처럼 보냈다. 회사와 집 사이를 오고 가는 일상이 당연한 우리에게 회사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오늘만큼은 회사보다 나 자신과 서로를 우선하여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각자가 안고 있는 고민은 조금씩 다르지만, 조금씩 비슷하게 서로의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오늘만큼은 '버텨야만 하는, 버티게 만드는 것'들을 걱정하는 순간에도 마냥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손에서 쉽게 놓아줄 수 있었고, 마음에는 '하고 싶은 것', '설레게 하는 것'들이 오래 자리 잡았다.

언젠가 네가  내게 '네가 좋아하는 것을 볼 땐 이런 모습이야. 이 모습을 기억해'라고 말해줬던 것처럼, 오늘도 나는 우리의 시간 속에서 그동안 어렴풋해져 버린 '꿈꾸는 나'를 찾게 돼. 그런 내가 선명해질수록 너를 향한 고마운 마음이 짙어져.

오늘이 길게 늘어져서 내일도, 내일모레도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참 좋겠다.

- 평일의 여유, 너와 함께했던 날.


난간에 걸터앉지도 못한 채, 그 끝에 겨우 서있는 날들이었어도.

네 앞에 서면, 나는 자꾸 설레. 꿈을 꾸게 돼.


다시 돌아온 일상, 같은 자리에 똑같이 서 있어야 하는 날들이 그 이후로도 이어졌어도.

부는 바람에 짙어지는 위태로움을 바다를 헤엄치다 맞서는 당연한 파도쯤으로 여겼어. 거센 파도여도 꿈 속이었으니, 괜찮았던 것 같아. 그렇게라도 꿈이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어.




11.11.


또 하루가 지나갔다. '버틴다'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니 버텨낸 하루였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도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다가 걸음을 내디뎠다.


떠난 그의 말처럼 '감정이 예민한 순서대로 느끼는 힘듦'을, '충분한 감정적 교류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위기'를 참 오랫동안 홀로 안고 있다. 이럴 때마다 자의, 타의에 의해 유별난 감수성을 가졌다는 평을 가진 나는 '로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감정이 없다면, 덜 힘들까 싶어서 말이다. 나의 위기는 항상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이 질리면서도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정해진 TO DO LIST도 없고, 정해진 해결 방법도 없는 이 대책 없는 위기를 이번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공기 속의 일이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 자주 답답하고 공허하다.


마치 짓다만 건물 중간층에 서서 캄캄한 밤을 내다보는 듯한 기분이다.




11.18.


어느 날엔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괜찮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보아도, 괜찮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내게 '괜찮다'라는 말을 해줄 만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를 되뇌어 보는 것으로 대신해보았다. 그래도 별 소용이 없는 날이 있었고, 그런 날에는 손바닥에 '괜찮다'란 글자를 조그맣게 세 번 적어 두고, 때때로 보았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러면 필요에 의해 적절한 순간마다 스스로를 잘 다독이며 비교적 '괜찮은' 하루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 버텨내 보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괜찮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으면,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힘든 나'라도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나갈까. 눈 감고 잠이나 잘까.


오후 세시쯤 되면 김은 자신이 구식 프린터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너무 많이 출력해서 늘 열 받아 있는 상태고 어딘가에 용지가 걸려 있으며 잉크가 다 소모된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네시쯤 되면 김은 스스로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 서유미 소설집 <당분간 인간> 수록작 '삽의 이력' 중에서




11.25.


출근길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가 살아온 긴 시간, 그 나무가 보았을 세상의 변화.


내가 모르는 시간을 포함하여, 당신은 이 자리에서 참 오랫동안 버텨왔겠군요. 초록색 잎이 붉게 물 들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다시 잎이 피어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을 당신의 시간을 상상해요.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지나쳐가고, 수많은 풍경이 당신을 지나쳐갔겠지요. 그 긴 시간을 당신 홀로 이 자리에서 보내왔군요. 외롭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잘 살아왔네요. 나는 매일 아침 당신을 올려다보며, 인사를 건네고 마음을 다 잡아요.

'안녕. 오늘도 잘 다녀올게요. 이곳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온 당신을 떠올리며, 나도 잘 해볼게요. 당신이 괜찮은 것처럼, 나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괜찮겠죠.'

'걱정되고, 힘들고, 두려운 날이긴 하지만, 이 역시 그저 당신이 지나온 수많은 날들 중 하루일뿐이겠죠?오늘도 무사히 다녀올게요.'

'오늘은 햇살이 좋네요.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니, 홀로 서있느라 외로웠을 당신도 오늘은 따뜻할 것 같아요. 나도 잘 다녀올게요.'

'벌써 한 겨울이네요. 남아 있는 나뭇잎보다 떨어진 나뭇잎이 더 많네요. 앞으로 더 많은 나뭇잎들이 당신을 떠나갈 텐데, 그래도 너무 외로워말아요. 당신 곁을 떠나는 나뭇잎이 많을수록, 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곧 봄이 올 텐데, 나도 당신도 좋은 하루!'

언제나 고마워요. 지나고 난 시간들은 모두 당신과 함께한 날들이라 괜찮았어요.


버티다가 괜찮다가, 또 안 괜찮다가 괜찮다가. 그대로 멈춰서 있기 조차 쉽지가 않고, 또 무의식적으로 쉬울때도 있고. 알쏭달쏭하겠지 누군가에겐, 4차원의 세상. 내겐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 위한 유일하면서 최후의 수단인 것이고.



월간 4X5 <다섯 개의 단어, 스무 번의 시>는 한 달 동안 다섯 개의 단어, 각 단어 당 네 번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짧고 주기적인 생각, 무질서한 개인의 감정과 사유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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