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수요일 : 걸음
발걸음을 먼저 떼고 일어섰다.
'떼어낸다'는 동사의 의미를 곱씹었다.
발걸음을 내딛기 이전에, 발걸음을 떼어내는 것.
한자리에 한동안 머물렀던 마음을 떼어내는 것.
며칠 간격으로 홀로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이 안에도 있다. 분명, 혼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마냥 혼자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아슬아슬한 길을 나서게 된다.
이 안에...(중략)... 사람이 있다.
내가 자꾸만 울컥하는 이유는 나의 힘듦으로 인해 시작되는 것보다, 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시작되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잘될 거야'란 글귀를 내밀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선 '그래서 그랬구나, 괜찮아질 거야'라며 날 달래는 이 옆에서 참았던 울컥하는 마음이 눈을 뜨자마자 다시 찾아온다.
자꾸만 걱정하게 해서 이들에게도,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에게도 자꾸만 미안해진다. 그동안 글과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고마운 순간들이 내 주변을 맴도는데, 그럴수록 더욱 미안해지기만 한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괜찮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괜찮아져야 한다. 캄캄한 밤이어도 달빛을 쫓아야 하고, 달빛을 오래 품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캄캄한 밤이라도, 그곳이 바다 한가운데라도 환하게 빛을 낼 줄 알아야 한다.
- 2월 7일 밤, 그 이후 : 첫. 눈물. 옆. 밤. 마음. 아침.
앞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껏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당신이 나란히 옆에서 걸어봐 주니 좋고, 이렇게 위로하며 살면 되는 건가 싶고.
무슨 마음인지도 모른 채 한참 동안 운동장을 돌았다.
내 귓가엔 당신의 달달한 말이 맴돌아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눈포래 치는 벌판을 휘정휘정 돌아오며
내가 사랑했던 꽃과 나무와 지명과 사람을 차례로 불러보며
내가 그리워하는 백석과 용악을 읽는다
어른거리는 시행 사이로
이제 곧 남의 사람이 될 그네가 어지러이 지나가고
끝내는 백석과 용악과 내가,
바구지꽃과 흰 당나귀와 나타샤와 그네가 뒤엉켜
목 놓아 울며 겨울 강을 건너는
어깨를 들먹이며 끝내 잠들지 못하는 이 밤
그만하면 됐다
겨우내 그만치 앓았으면 이젠 다 털어내도 되겠다.
- 곽효환, '백석과 용악을 읽는 시간' 中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을 정리해놓고 다시 읽어보니, 남몰래 붙여놓고 때때로 살펴보는 포스트잇의 문장과 그 맥락이 닿아있었다. '수단이 되지 말 것. 힘들어하지 말 것. 괜찮다 괜찮다 하면 괜찮을 것.' 나는 살아남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숨쉬기 위해 무던히 나를 붙잡고 무엇가를 끈질기게 하고 있었고 그들도 비슷했다. 같이 있어도 세상 홀로 산다고 느끼는 하루였더라도, 세상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고민과 마음을 품고 있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나은 것 같았다. 마음을 곱게, 착하게 먹기로 했다.
그만하면 됐다.
겨우내 그만치 앓았으면 이젠 다 털어내도 되겠다.
월간 4X5 <다섯 개의 단어, 스무 번의 시>는 한 달 동안 다섯 개의 단어, 각 단어 당 네 번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짧고 주기적인 생각, 무질서한 개인의 감정과 사유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