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튜브를 헤매다 우연히 유명한 방송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는 현재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스포츠 스타이기도 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후 은퇴를 했고, 철저한 자기관리와 예리한 상황 분석력을 통해 방송인으로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강연은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에게 던지는 진지한 성찰의 메시지였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고 단호했다. 마치 묵직한 직구만으로 글러브에 야구공을 꽂아 넣는 듯 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설의 화법들은 송곳처럼 의식을 파고들었다.
특히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 완전 뻥이에요.’ 라고 말하는 그의 선언과도 같은 성토는 울림이 컸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젊은 청춘에게 점수 따고 좋은 얘기를 하려고 즐기면 된다고 하지만 즐겨서는 절대 안 된다. 즐기는 것이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즐겨서 이뤄낼 수 있는 건 단연코 없다. 큰 성과나 성공을 바라지 않고 돈이 많지 않아도 즐겁게 살래 하는 이들은 괜찮다. 하지만 내 꿈을 이루고 내가 원하는 곳까지 가고자 한다면 즐겨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 없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도 그렇고 내 주변 사람들을 봐도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꼭 어떤 목표가 아니더라도 생존의 현장에서 하나의 객체로 살아남기 위해 쉼 없이 내달린다. 그들을 붙잡고 ‘지금 당신은 즐기고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단호히 ‘아니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앞선 내용에서도 언급했듯이 한 가지 의문은 든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 강연에 나온 스포츠 스타의 경우 압도적인 선수,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재능도 갖추었을 것이다. 기본적인 재능에 피나는 노력이 더해져 누구도 쉽게 뛰어 넘을 수 없는 위치를 확보했다. 이처럼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남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꾼다면 당연히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만일 그 목표가 굳이 최고나 더 나은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 남을 의식하면서 내 영역을 확보하지 않아도 된다. 그 때 그 때 나에게 쥐어지는 작은 것들에 만족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즐기면서 오래도록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즐기면서 사는 것일까?
흔히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 라고 하는 말의 출발은 공자에서 비롯된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에 보면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라고 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세 가지 화두는 바로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이다.
‘아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 라고 하는 지각이다. 어떤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 어떤 음식을 맛보고 ‘맛이 있다.’, 어떤 음악을 듣고 ‘그리움이 밀려온다.’와 같이 일정 대상을 통해 알거나 느끼거나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알거나 느끼거나 깨달은 것으로 인해 점점 친근함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영화가 재미있어 또 보고,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을 때마다 그 음식을 주문하거나 요리해 먹는다. 그리움이 밀려오면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 열린 마음으로 어떤 대상의 개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시에 일정한 거리감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즐기는 것’은 온전히 그것에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와 물을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듯이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있어야 만족스럽고 편안하다. 내가 그것을 위해 본격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더 많은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것을 내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 김치찌개, 순댓국, 설렁탕 같은 몇 가지의 음식이 있다. 내가 맛을 보고 김치찌개가 입맛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아는 것’ 이다. 그 뒤로 생각날 때 마다 김치찌개를 주문해 먹거나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먹곤 한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 이다. 매번 김치찌개를 주문해 먹거나 직접 요리해 먹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진짜 맛있는 김치찌개를 제대로 먹어 보고 싶다. 본격적으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김치찌개 탐방에 나선다. 심지어 내가 제대로 된 김치찌개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것은 ‘즐기는 것’ 이다.
‘아는 것’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것’에서 ‘즐기는 것’으로 이행되는 관계는 이렇듯 일정한 성숙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러한 성숙을 가능케 하는 요소이다. 내가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거나 깨닫기 위해서는 관심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관심과 의지가 없다면 내 눈앞에 그 무엇을 들이밀어도 의미가 없다. 관심과 의지는 내가 알기 위해 투여하는 노력이다.
‘좋아하는 것’은 또 어떠한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관심이 잦아지고 시간을 투여한다. 시간만 투여하는가. 일정한 비용도 투여가 된다. 음식을 예로 들자. 맛있다는 집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고, 서로 다른 집에서 배달을 시켜 비교하기도 한다. 직접 요리해 먹기 위해 재료를 구입하고 너튜브를 보면서 요리법을 배우기도 한다. 이것 역시 노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즐기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본격적인 목표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고 확인하며 빠져든다. 시간, 비용, 발품까지 그야말로 들이는 노력이 적지 않다. 그래도 아깝다고 느끼지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부담을 줄 수도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 드는 의문이 있다. 노력과 즐김은 별개의 문제인가? 노력과 즐김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에서 ‘즐기는 것’으로 가는 과정은 노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궁극의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언가를 인지하고 노력에 노력을 더해 내 것으로 완전히 체화가 되었을 때 몸과 의식은 저절로 반응을 한다. 이는 곧 몰입이요, 즐기는 것이다.
‘즐기는 것’을 단순히 감정과 마음자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결과물이다. 그 노력의 결과물로 나도 모르게 거기에 몰입되는 순간이 바로 ‘즐기는 것’ 이다. 비록 나에게 고통을 주고 힘이 들지라도, 끊임없이 목표를 설정해 주고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할지라도 그 안에 즐김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노력의 극단으로 이루어낸 ‘몰입’ 이요 ‘즐김’ 이니 아무나 함부로 도달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라는 것에 대한 오해는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