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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lar Oct 24. 2021

거, 학교 가기 딱 좋은 나이네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지 나 대체 언제 죽냐고

나의 고모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고모님께서는 백 세를 거뜬히 넘겨 사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이미 70대 노인이셨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연세가 90을 넘겨 생신 때면 동장님에게 축하를 받는 장수 노인이셨으며, 

나의 서른 즈음에는 우리 집안 최초로 세 자릿수 연세를 기록한 놀라운 노인이 되셨다.

집안 살림이며 행사를 직접 챙기고, '봄 되면 어린이대공원에 꽃구경 데려가 다오'라고 구체적인 요청 겸 지시를 내게 할 만큼 몸도 건강하고 마음에 의욕이 넘치셨던 고모할머니.


그런 할머니조차 90세를 넘기시던 그즈음부터는, 찾아뵐 때마다 고정 멘트로 푸념을 하셨다.


"얘, 나 언제 죽니?"


구전하는 유머 중에 '3대 거짓말'이라는 게 있었다.

(요즘 상식 기준으론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첫 번째 거짓말은, 미혼 여성이 '나 시집 안 간 거예요'라고 하는 말.

두 번째 유명한 거짓말은 상인이 '밑지고 파는 겁니다'라고 하는 말.

그리고 세 번째 거짓말은 노인이 하는 '나 빨리 죽고 싶다'는 말.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나 언제 죽냐'는 말이 흔해 빠진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왜냐면 할머니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도 전혀 돌아가실 분 같은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설날마다 꼿꼿이 앉아 세배를 받으시며 나 언제 죽냐, 지겨워 죽겠다, 이제는 좀 가고 싶다, 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계속 외셨으니까.


삼십대 초반의 나이 언제쯤인가, 내 인생이 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시점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인생의 시간표대로 내 인생이 굴러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신혼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하고 있건만 난 미혼인 데다 내 집 마련은커녕 쥐고 있는 돈도 별로 없었다. 회사에서도 동기들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성과도 없이 겉도는 것 같기만 했다.

그때 난 정말로 너무나 괴로웠다. 

인생의 모든 가능성은 이십대까지만 주어지는 것 같았는데 난 돌이킬 수 없이 삼십 대가 되어 있었다.

이제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늦어버린 나이에.


바로 그때쯤 할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남들은 '호상'이라 했지만 가족들은 슬프고 아쉬울 따름이었다. 할머니를 어려운 마음으로 보내드리며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들려왔다.


"얘, 나 언제 죽니?"


할머니는 그 말씀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십오 년을 족히 더 사셨다. 할머니도 당신께서 그렇게 오래 사시면서 세상 떠나는 날을 십오 년이나 기다리게 되실 줄은 상상도 못 하셨을 거다. 만약 할머니가 조금만 더 젊으셨다면, 그 십오 년 동안 뭘 해내도 한 가지는 제대로 해내셨을 거다. 혹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을 지라도, 무려 십오 년이 앞에 놓였다는 사실을 아셨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조금 덜 지루한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내시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삼십몇 년밖에 되지 않은 내 나이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작 삼십 년쯤 살아놓고 모든 게 너무 늦어버렸다며 체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게 보였다.

말로만 듣던 백세 시대를 진짜로 살아버리는 노인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나였다. 할머니 인생의 삼 분의 일도 채 살아놓지 않고서 인생이 다 끝장났네 어쩌네 하던 나를 할머니가 보신다면,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얘, 너 말이지, 아주 틀려먹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하실 것만 같았다.


사실 그 이후로도 내 방황의 역사는 십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내가 결단을 내리고 '마흔 살의 파릇파릇한 신입생'이 될 수 있었던 건, 얼마간 무료하고 또 얼마간은 적적했을 할머니의 그 마지막 십오 년 덕이 크다. 그 때를 기점으로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언제까지 내 인생이 이어질지, 할머니가 그랬듯 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삶이 생각보다 상당히 길어질 수 있다는 것, 내가 아직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살아보지 못했을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래서 난 마흔에 새로운 시작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까지 가지지 못한 것들,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주눅들기 쉬운 나이 마흔. 

그러나 인생을 조금만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스물이나 서른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육칠십 노년보다 신체적으로 쌩쌩한 마흔 이 나이, 

학교 가기 딱 좋은 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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