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ylar Oct 24. 2021

프롤로그 : 마흔입니다

파릇파릇한 신입생이고요

대학 캠퍼스에 첫발을 딛던 스무 살 시절, 내가 꿈꿨던 마흔의 삶은 아름답기만 했다. 

햇살 잘 드는 내 집에서 눈을 뜨고 모닝커피를 내려 마시는 여유로운 일상.

배우자와 동등한 경제력을 갖추고 예쁜 가정을 함께 가꿔 나가는 커리어우먼.

이 사회와 경제를 받치는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겠지만, 

가끔은 새끈한 외제 컨버터블에 몸을 싣고 7번 국도쯤은 달려주는 영 포티의 멋 같은 것들. 


하지만 2021년, 대망의 불혹을 맞이하는 내 현실은 그 시절 꿈꿨던 모습과 1%도 닿아있지 못했다.

내 집은커녕 좁아터진 원룸-나의 모친께서 사글셋방이라 부르시는-에서 눈만 뜨면 계속되는 월세 걱정.

멋진 배우자를 얻거나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되는 일, 외제 컨버터블 구입 같은 꿈은 잊어버린 지 오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반백수 프리랜서 신분.


외국어고등학교와 이른바 SKY대학교를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던 내가 

이 나이에 이토록 지질한 상태로 살게 된 건, 

20대에 뒤늦게 시작된 사춘기적 방황과 30대에 무식하고 용감하게 내려버린 퇴사라는 선택 탓이 크다.

프리랜서로 살아온 최근 십 년간, 한동안은 자존감이 한없이 무너지기도 했고 

변변찮은 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밤낮도 휴일도 없이 발버둥 치며 일하다가 

아무도 몰라주는 프리랜서 혼자만의 번아웃을 겪기도 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갑질과 박봉에 시달릴 때면 영화의 명대사를 되뇌며 나 자신을 위로하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명대사는 스크린 위에서나 빛날 뿐, 

자꾸 얇아져만 가는 내 지갑은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가오'도 지켜줄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다.

난 누구며, 뭘 잘할 수 있으며,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 것인가?


스무 살, 서른 살 때도 하던 이런 고민을 마흔 살 때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때때로 찾아오는 통렬한 자아비판과 자기혐오를 피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지난 십 년간 '야전'에서 구르며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다는 사실이었다. 

학교와 회사의 안온한 틀을 벗어날 줄 몰랐던 과거의 어린 나와 달리,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새로운 선택과 시작이 주는 두려움에 어느 정도 맞설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40대를 열며 내가 택한 길은, 공부였다.

서른아홉 살 겨울에 나는 대학원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았고

마흔 살 봄, 신입생이 되었다.


얼굴에 찍힌 베개 자국이 오전 내내 지워지지 않는 탄력 저하의 나이, 마흔.

결혼이나 출산보다 부고 연락을 더 많이 받게 되는 나이, 마흔.

입사 시절 기억은 이미 까마득하고 퇴사 이후를 계획하는 것이 응당 옳을 듯한,

모든 면에서 시작보다는 끝을 바라보는 게 어울릴 법하다 생각했던 그런 나이 마흔에,

나는 나 자신을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