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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lar Oct 24. 2021

누구냐, 넌?

자기소개서가 불러온 불혹의 질풍노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만 살아왔던 대학원 입학의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준비할 것들이 생겼다.

졸업증명서나 성적증명서 같은 기본 서류, 영어 공인시험 성적, 그리고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


비록 접속한 지 오래된 모교 포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다시 찾아내는 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서류 발급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 이름부터 거창해 작성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학업계획서는, 인터넷에서 전공 관련 정보들을 찾아 공부하며 채우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적혔다. 게다가 '학업계획서 작성하는 법' 뭐 이런 참고 문서들도 인터넷 포털에 널려 있었다. 아, 빛과 소금 같은 21세기 집단지성의 힘이여.


의외의 복병은, 자기소개서였다.

당초엔 과거에 써놓은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짜깁고 고쳐서 내면 금방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파일을 열어보니 예전 직장 업무와 그 성과 중심으로 나를 포장해놓은 그 문서 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또 이직을 하고, 퇴사를 하고 이런저런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나는 부지런히 자기소개서를 썼더랬다.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회사에 지원할 때는 정해진 자기소개 양식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과거 대기업에 써 보냈던 자기소개 내용을 비슷하게 적어 보내면 그만이었다. 

전공은 뭐였는지, 성취와 실패의 경험은 뭐가 있었으며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내 성격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등등등.

사회에 나온 지 대략 십오 년, 나는 그런 돌고 도는 항목에 맞춰 뻔한 글로 나를 내보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대학원 자기소개서는 달랐다. 양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흔에서야 들어서는 학업의 길은 더 나은 연봉이나 근무환경을 얻기 위한 현실적인 욕구의 영역이 아니라, 먼 길을 돌아 다시 찾아온 꿈의 영역이었다. 한동안 꿈이라는 걸 내려놓고 살아온 나는, 자기소개서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주는 그 무게에 그만 막막해졌다.


저는


저는


저는


...


워드에 이 두 음절을 적어 넣은 채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난 누구지? 

난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지?

난 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 학교에다 들이대고 있는 거지?


나를 곤란하게 한 건, 어떤 항목이나 요구사항도 없이 자기소개서를 써내라고 한 학교가 아니었다.

내 삶의 모습이 어떠하며 내 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그냥 태어난 김에 살아지는 대로 살아온 나 자신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보면 아주 어릴 적에는 꿈을 정말 꿈처럼 꿨던 것 같다.

매일 밤 뉴스에 등장하는 대통령도 되어 보았다가, 만인에게 사랑받는 배우도 되었다가, 세계를 누비는 기업인도 되었다가, 역사에 남을 연주를 하는 음악가도 되었다가 하면서.

그러다 어른이라는 게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꿈은 없어져버렸다.

제 분수와 현실의 장벽을 인식하는 성인이 꿈을 꾼다는 건 상당히 유치한 일 혹은 한가한 자의 사치처럼 생각되었고, 매일 겪는 밥벌이의 치열함과 치사함은 오래 품었던 꿈을 쉽게 포기하는 데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나마 한때 버킷리스트라는 걸 작성하는 게 유행했지만, 그건 진짜배기 꿈이라기보다 욕망의 총체 같은 것일 뿐이었다.


남들만큼은 벌고 싶고, 남들 먹고 남들 입는 거 나도 누리고 싶고

동료만큼 혹은 동료보다 더 뛰어나게 성과를 내고 싶고

주식이며 코인이며 대박을 낸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나도 그런 벼락부자가 되어보고 싶고

뭐 이런 생각들은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줄기차게 해 왔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사유는 전혀 없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 자기소개서의 벽에 가로막혀 방황하느라 나는 원서접수 마지막 날 밤에 겨우 원서 제출 버튼을 눌렀다.

입시 일정에 맞추어 꾸역꾸역 자기소개서를 써내긴 했지만, 

다행히 합격과 입학이라는 좋은 결과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작년 11월에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받아 든 화두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무겁고 버거운 화두를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짊어지고 갈 생각이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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