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87세가 되는 엄마는 4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면서시골집에 혼자 계시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넓은 집을 부지런히 관리하며 그런대로 잘 지내시는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혼자시다 보니 규칙적인 식사가 무너지면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급기야 선망증상까지 보이시면서 시골에 혼자 두기에는 위험한 상황이 되어 마침내 재작년 겨울 대도시에 사는 언니가 엄마를 모시고 갔습니다. 갑작스레 고향집이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봄이 되었을 때쯤나는 언니들의 명을 받고집상태를 점검하러고향집을찾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고향집에 도착해 담벼락에 주차를 하고굳게잠긴대문을열었습니다."엄마 나 왔어요~" 하면"오매 우리 희라 왔냐~" 하며 반기시는 엄마 대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나를 반긴 건 뜻밖에도 내 어깨만 하게 자란노란 갓꽃이었습니다. 뒷 텃밭의 갓씨가앞마당까지 날아와시멘트마당 갈라진 틈에서자라나텃밭으로 가는길목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나는그 관문을 뚫고장독대를 지나 뒷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두둑마다 다른 작물을 심어 놨던 넓은텃밭은밭고랑 경계가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노란꽃을달랑달랑 달고 있는 넓은 갓꽃밭이되어 있었습니다. 재작년겨울 집을 떠나온 엄마는 나에게 늘 "텃밭에 갓이 한참 좋을것인디누가 해다 먹으면 좋겄다" 하시며 텃밭의 갓을 아까워하셨습니다. 그한 참좋은 갓이 무럭무럭 자라 엄마의 시골집을접수하고 있었습니다.
달랑달랑 달려있는노란 갓꽃들이 따뜻한 햇살을받으며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이고있었던 것으로, 아련하게 회상하고싶습니다만사실 갓꽃이 갓나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텃밭의갓줄기는키가 크고 두꺼워서심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저 갓나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심난함은앞마당사정도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른 나뭇잎들이 뒹굴다 뒹굴다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시멘트 틈새로잡초와 갓꽃이비집고 나와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수돗가의 배수로에도 갓나무와 풀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겨우 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겨우 한 계절 엄마가 없었을 뿐인데엄마의 시골집은 사연을 간직한 빈집, 나간 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시골집을 다녀와 갓에 점령당한 집상태를 언니들에게 보고 했고 언니들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이제 엄마가 시골집으로 돌아가기는 만무하니,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일단 집을 정리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골집 정리 프로젝트는 시작되었고 그 1단계는 텃밭 정비였습니다.
나는말 떨어지기 무섭게 예전에같이 근무했던 시설관리 선생님께전화를 걸어알바를 제의했습니다. 친구분과 함께 예초 장비와 제초제를 준비해서 하루 만에 뒷텃밭을 말끔히 정리하고 앞마당 정원의 풀도 정리해 주셨습니다.마무리로 텃밭에 제초제까지.
외부가 그런대로 정비가 되자 그다음 2단계는 집안정리였습니다. 'ㄱ'자 모양의한옥은방이 4개 거실 겸 부엌이 1개, 욕실 1개, 넓은 다용도실이 1개가있는 25평 상당의꽤 넓은집이었습니다.아빠가돌아가신 후 2년여 동안 엄마 혼자 사시면서노인치고는잘정리하고사셨지만 옷이며 침구 부엌 살림살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명절 땐 6남매가 각자의 가족들과 함께이곳에모여 먹고 자고 했으므로 엄마는 식기나 침구 등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정리는 1남 5녀 중 셋째 언니가 본인과 나, 광주에 사는 막내 이렇게 셋이서 해보자고제안했습니다. 난 '묵은 짐이 장난이 아닌데 과연가능할까? 언니가꽤 용감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언니 말을따르기로 했습니다.
6월 어느 토요일로 날을 잡았고, 평소 우리 집 이사도 늘 전문가의 손에 맡기며 큰 짐정리 경험이 없는나는 25평의 시골집 정리를 앞두고이 궁리 저 궁리를 시작하였습니다. 집 정리를 하자면 버릴게 천지일 텐데 시골 동네에 분리 배출 하는 곳이 제대로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분리 배출할 곳이 마땅찮으면 차에 실어 가져올 생각으로 이삿짐센터의 주황색 바구니를 5개 정도 대여했고 재활용 쓰레기를 담을 파란색 청봉투 1묶음, 고무장갑 3세트, 면장갑 1세트, 앞치마, 작업복등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종량제 봉투는 현지에서구매하는 걸로.
드디어 그날이 되었습니다!
셋째 언니는 수원에서 KTX를 타고 오전 11시에 목포에도착했고, 언니를 픽업해서강진으로 갔습니다. 광주에서 내려온여동생과 만나 유명한 강진 한정식을먹으며 오늘 미션의투지를다졌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벌써 1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각자 준비한 작업복으로 환복을 하고 언니는 부엌으로, 나는엄마 옷과 침구가 있는방으로, 여동생은 오만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다용도 실로각자 흩어졌습니다.
사실 엄마가 평상시 입을만한 옷은 이미 챙겨갔으므로남은 옷들은버릴지, 재활용할지를 결정해서버릴 옷은 종량제 봉투에 담아일반쓰레기로 배출하고, 재활용 중 [상:] 품은 이사박스에 담아 목포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를, [하:] 품은 청봉투에 담아 재활용으로 배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습니다.40년 된 자개장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옷들은 엄마의 인생이었습니다. 큰언니 결혼식 때 입은 인조 퍼 숄과 한복,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에 뛰어든 작은언니가 백화점에서 사서 보낸, 어렸을 적 나도 엄마 몰래 입어봤던 초록색 롱 투피스, 엄마 회갑 때 우리가 사드린 닥스 분홍 점퍼 등 옷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엄마의 인생 페이지가 열렸습니다. 옷을 버리자니 엄마의 인생을 구겨서 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옷만 잔뜩 꺼내놓고 별 진척 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괜한 일을 벌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과연 우리 손으로 짐정리가 될까? 겁도 났습니다.
다용도실에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동생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언니야 이거 어떻게 해야 돼!" 하며 볼멘소리를 하였습니다. 대야, 소쿠리, 들통, 김치통들이 사이즈별로 켜켜이 포개져 있었고 진즉 버렸어야 할 플라스틱 병과 낡은 조리도구들이 다용도실에 좌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 시골 어르신들 행사에서 소쿠리, 대야 공짜로 받아오면 정말 오져하셨는데... 이걸 버려야 할지, 그대로 둬야 할지, 재활용으로 배출해야 할지, 종량제봉투에 담아야 할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셋째 언니는 일단 가전, 가구 외에는 과감하게 다 버리되 종량제봉투에 담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사용 가능한 건 청봉투에 담아 최대한 재활용으로 배출하라고 지침을 내렸습니다. 방법이 결정되자 일에 속도가 붙었고 손이 빠른 동생은 저의 2배속이었습니다.
우리 자매들은 잡담 한마디 나누지 않고 각자의 장소에서 정리에 몰두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쉬었다 하라는 언니의 말에도 정 힘들 때 잠깐 방바닥에 드러누워 굳은 허리를 펴는 것 외에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체력이 모두 약해서 정리가 길어질 경우 몸이 지쳐버리면 죽도밥도 안될 불상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종량제봉투와 재활용품을 담은 청봉투를 처마아래 10미터 정도의 섬돌 위에 2줄로 놓았습니다. 50개가 넘는 봉투를 보니 저걸 작은 시골 동네에 어떻게 배출할지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음식물쓰레기!
새벽 일찍 일어나 멀리서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언니는 쉬지 않고 엄마가 쓰시던 대형 냉장고 2대에서 음식물을 파냈습니다. 두 양동이 정도 나온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전용 종량제봉투에 담기에는 봉투가 너무 작아 고민 끝에장독대 옆 작은 텃밭에 묻어 보기로 했습니다. 삽으로 구덩이를 파면 간단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텃밭 흙은자갈도 많고단단했습니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캄캄한 밤이 되었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습니다. 언니는 휴대폰 플래시로 밭을 비춰 주었고 나와 동생이 번갈아 가며 삽질을 하였습니다. 비가 오니 후드 모자까지 뒤집에 쓰고 삽질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영화 속 오싹한범죄 한 장면이었습니다. 서로를 보고 무섭다며 웃느라헛삽질을했고 그 모습 또한 웃겨서 셋이서 배꼽을 쥐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그삽질로 인한 한바탕 요절복통이 끝이 안 보이는 시골집 정리를 하면서 가졌던 긴장과 피로를 많이 씻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묻는 것으로 그날의 집정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내일 섬돌에 모아둔 종량제봉투와 재활용 봉투를 잘 배출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동생을 깨워 종량제봉투와 청봉투를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실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어귀 여기저기 쓰레기 배출장소를 다니며 조금씩 버렸습니다. 종량제봉투조차도 너무 한꺼번에 많이 배출하는 것이 왠지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재활용품은 더욱이 무단투기로 오해를 받지 않을까 걱정되어여러 곳에 조금씩 나눠 버렸습니다. 차로 3번 정도 실어 나르며 배출을 했나 봅니다.
도저히 어디다 버릴 수 없는 전기매트나 큰 이불은 잘 접어서 창고에 정리를 했고, 커다란 가족사진 액자들도 떼네 창고로 보냈습니다. 이로서 60년 묵은 혹은 그 이상된 엄마의 물건, 우리 가족들의 물건들과 작별을 고하고시골집 정리 프로젝트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가전, 가구를 제외한 그 많은 물건들 중에 우리가 가져온 물건은 불과 이불 두 채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할 8벌 정도의 외투였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급하게 처리했던 시골집 정리는 정리라기보다는 잘버리기였습니다. 엄마가 좀 더 오랫동안 시골집에서 건강하게 지내셨다면 엄마와 계속함께 했을 물건들이었지만, 주인을 잃은 물건들은 그들 또한 버려지는 신세가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나마 우리가 동네 어귀에 배출했던 재활용품을 지나가던 시골 아주머니들께서 쓸만한 건 가져가시는 걸 보니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엄마의 인생이 보였습니다. 한참 시절엔 우리들 키우며 먹고사느라 정신없었지만 노년의 엄마 인생의 동반자는 아마도 이 집과 텃밭, 그리고 옷, 살림살이였나 봅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애먹었던 수많은 옷, 이불, 냄비, 대야, 소쿠리를 보니 짐작이 갔습니다. 나이 드셔서도 늘 부지런히 자신과 집안을 가꾸셨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 어떤 물건과 인생을 같이 가고 있을까? 하는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최근엔 단연코 휴대폰이겠지요. 앞으론 좀 더 활동적이고 다양한 것들이었음 합니다. 운동복, 미술관 관람티켓, 나만의 레시피등이 앞으로의 내 인생의 동무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또한 엄마의 물건을 버리면서 물건과의 인연도 너무 쉽게 함부로 맺을 일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쿠리 하나도 엄마의 손때 묻은 것을 버릴 때 많이 미안했습니다. 편리하고 윤택한 생활을 위해 능력 껏 갖출 수도 있지만 인연을 맺을 땐 신중히, 쓰다가 나에게 소용이 다했다 싶은 것은 다른 인연도 찾아 주고, 다른 인연이 안 나타나면 과감히 작별을 고하면서 가볍게 가볍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남은 내 물건들은 좀 두어도 괜찮겠지요. 남은 가족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