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그 지독한 것.
<보 이즈 어프레이드> (2023)
사람의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처럼 비가 오다가 마는 날씨였다. 빗방울의 무게감이 0에서 100을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뭐가 본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는 사랑, 헌신과 같은 것을 기대받는다. 간혹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겠지. 그래도 부모인데.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비가 오다마다 하듯이 이리저리 바뀌는 감정을 보고 속마음이 뭔지 알 수 있을까?
극이 절정으로 차오르고, 모나는 보의 속마음에 자신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확인하고 싶어 한다. 마치 사랑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기어코 목적을 달성하고, 이어서 엄마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자신은 엄마에게 결핍을 받았지만, 보에게 가득 주기 위해서 마음을 쥐어짜 내서 살아왔다고. 하지만 그 대가로 받은 것이 또 하나의 결핍이라고. 그렇게 게워내다가, 중요해 보이는 것이 툭 하고 토사물 위로 떨어진다. 보에게 남은 감정이 증오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보가 기다렸다는 듯이 모나의 목을 조르는 것으로 화답한다.
부모가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장면의 빈도를 공평하게 고려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증오의 인내를 통해서 부모는 자식을 품 안에 가둘 힘을 가진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의 무게감은 자식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적절한 정당화가 함께한다면 부담감이 죄책감으로 연결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매섭게 목을 조르던 기세는 금세 사라지고 보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부정하고, 변명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자기 본모습인 것처럼. 오랜 세월 모나에게 통제당했던 남성성을 회복했어도, 홧김에 목을 졸라 죽여버렸지만, 모나가 선사한 죄의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보는 그 죄의식에 잡아먹힌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공자는 죽어서 유교보이를 남기고, 아몬드는 죽어서 다이아몬드를 남기고, 키위새는 죽어서 키위를 남기고, 엄마는 죽어서 죄의식을 남겼다. 자식은 결국 부모를 잡아먹고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부모가 쉽게 먹혀줄 리 없다. 아이에게 자신의 보호자는 가장 먼저 만나는 투쟁의 상대이며, 이 둘은 근원적인 증오의 형태를 형성하는 관계이다. 이 관계야말로 적자생존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