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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급한 선수 Dec 10. 2023

고통, 동일시, 연대 1

에피쿠로스, <작별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작별하지 않는다>, <너와 나>, 싯다르타


0. 에피쿠로스

마음의 불안과 몸의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이다.

-에피쿠로스, 대략 2300년 전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고통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는 급진적인 논의를 진행하면서 고통이 없는 상태를 쾌락과 동일시했다. 쾌락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악이 단지 선의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유사하게 흥미롭다. 악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발상은 모든 것을 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적어도 2300년 전에는 이미 시작된 이 시도는...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요즘은 고통을 제거하려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생명을 중지하는 시도가 각광을 받고 있다. 문제가 자리 잡은 배경을 지우면 문제도 같이 사라지는 것은 자명하다. 2300년짜리 시행착오의 결과물이 군대식 일처리라니. 고통을 제거하고자 한 여정이 되려 군대 문화가 인류의 정수임을 드러내는 좋은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진짜 제발.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에피쿠로스가 고통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과 반대로, 고통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와 조현철의 영화 <너와 나>가 그 대상이다. 각각의 작품에서 묘사하는 고통의 양상을 통해 대안적인 형태의 고통관을 찾아보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서로 다른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고통과 동일시와 연대를 상호 관련적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디 이 흥미로운 지점이 군대 문화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길 바랄 따름이다.


1.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인 경하는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책을 썼고, 그 대가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다. 고통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자신이 체험하는 악몽으로 구체화된다. 고통의 무게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는 현실에서 광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현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홀로 남은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반복되는 꿈, 벌판에 심어진 검은 나무 기둥에 바다가 밀려오는 장면 밖에 없다. 그는 발등까지 차오르는 물을 보면서 바다가 뼈를 다 삼키기 전에 옮겨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한다.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끝없이 다시 써야 하는 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바닥에 달라붙어 호흡을 헐떡이는 것이 삶과 유일한 접합부로 남은 순간, 그는 파도를 피해 아직 뼈가 잠기지 않은 곳으로 도망치길 결심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물이 경험하는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다. 경하는 시공간적으로 격리된 타인의 고통을 삶에서 체험한다. 이는 고통이 나를 떠나 여러 간극을 뛰어넘어 타인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한 고통을 떠안는 일은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일이기에 경하는 이를 회피하고자 한다.


인선은 도망치려던 경하를 붙들고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게 만든다. 인선은 잘린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3분마다 손가락에서 피를 흘려야만 한다. 그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포기할 생각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하의 질문에는 "일단 계속해 봐야지"라는 대답을 내어놓는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 말려든 경하는 어느새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와 있다.
몇 년 전 경하는 반복되는 꿈의 장면을 영상에 담는 프로젝트를 인선에게 제안했었다. 사정이 안 맞다는 핑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경하가 꿈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을 때, 인선은 이미 나무를 심을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아니, 심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인선은 지금 당장 제주에 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경하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도 했다. 키우는 앵무새가 살아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인선의 말에 경하는 폭설이 내리는 제주 산간 지역을 향해 떠난다. 더 늦으면 새가 죽어버릴 거라는 인선의 경고는 경하는 더 깊은 눈 속으로 추동하고 있었다.


  고통은 떨어진 손가락을 다시 붙인다. 상실했던 연결고리를 회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고통임을 인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경하는 인선의 고통에 개입하는 행위를 통해 유리된 채로 짊어진 고통에서 벗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회복하고 있다.


눈 속에서 길을 잃은 경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선의 다큐에 나왔던, 열여섯에 닷새 동안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독립군 캠프로 돌아왔다던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노인은 물속에 빗발치던 총알이 자신만 비껴간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목격한, 학교 운동장에 쌓여있던 수많은 시체 위에 떨어지던 눈과 지금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눈이 다르지 않음을 자각한다. 경하는 그들의 고통이 한 덩어리로 빛나고 있음을 느끼며 황홀 속에서 잠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손가락을 건드리는 감각을 느끼고 깨어난다. 자신을 기다리는, 혹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새가 있음을 생각한다. 그는 경계를 넘어 불이 켜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경하는 고통의 배경을 제거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실패한다. 그 고통이 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짊어지고 가는 까닭은 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의 다르지 않음을, 고통이 가져오는 통각을 통해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경하는 고통받는 타자를 향해 연결고리를 뻗고 있다.


경하는 자신이 죽으러 이곳에 왔다고 생각한다. 쓰이지 못한 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버려지고 구멍 뚫리려고, 나무들 곁으로 가기 위해서 열에 들뜬 채로 잠에 든다. 꿈속에서 더 이상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섬이 아닌 벌판에는 죽음이 가득 펼쳐져 있다. 깨어난 경하는 이미 죽었을 새와 서울에 있을 인선을 만난다. 그제야 경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이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인선에게 알린다. 인선은 제목이 셋 중에서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묻는다.
1. 인사만 하지 않음 or 작별이 아님
2. 작별이 미완성됨
3. 작별하는 것을 유예하는 중임


 고통은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경하는 고통에 의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는 방향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의지로 물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습성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인선은 경하보다 먼저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기사에서 모로 누워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유골의 사진을 보고 고통을 감지한 순간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경하와 그랬듯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본다. 빨갱이 절멸을 위해서 군에 잡혀가서 해수욕장에서 총살된 사람들과 달리, 경찰에 붙잡혔다는 이유로 생을 부지하게 된 아빠의 이야기를,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손을 떨면서 살아가야 했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선은 근접성에 기반한 유대에 근거해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순간 근접성의 기준점은 모호해진다.


인선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꿈속 벌판에 순식간에 물이 차오른다. 경하는 악몽이 생명을,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곁에서 빼앗아 갔음을 토로한다. 인선은 그러나 경하의 곁에 자신이 남아있음을 촉촉한 눈으로 단호하게 명시한다.


 경하는 고통이 자신을 뒤흔든 결과로, 근접성에 기반한 유대를 모두 상실한다. 그러나 이는 더 넓은 형태의 유대를 가능케 하는, 경하의 존재를 확장시키거나 혹은 존재의 경계를 제거하는 일일 것이다.


인선은 엄마의 이야기를 철제 책장 속의 쏟아질 거 같은 상자더미를 뒤적거리고. 경하는 차오른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인선은 상자 속에서 엄마가 어린 시절 총을 맞아 피를 많이 흘린 동생이 한순간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를 빨아갔을 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경하는 인선의 엄마가 수집한 자료 위에서 자신의 지문과 그의 지문이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바닥에 도착한다.


 경하는 인선의 안내에 따라 타자와 자신이 분리되지 않음을 인지한다. 고통으로 점철된 순간 속의 행복을 엿본다. 온전히 타자를 향하는 마음속에서 행복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인선은 바닥에 도달한 경하에게 나무가 심길 땅을 보여주려 한다. 돌아오기 전에 초가 다 타버려 불이 꺼질 듯하다. 그곳은 아빠의 불타버린 집이 있던 터였고, 엄마가 어린 자신에게 사무치는 손길 속에 사랑의 고통을 전달한 곳이었고, 인선이 아빠와 엄마의 고통을 바라보기 시작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인선은 절멸을 위해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다 수천의 바늘이 그들의 고통처럼 몸에 박히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 행복을 느낀다. 인선은 고통과 행복 속에서 믿을 수 없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육지에 수감되어 있던 십오 년 동안 제주의 불타버린 집터를 바라봤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치매에 걸린 엄마와 함께 책상 밑에서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에 있음을 이해한다.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고통은 그 일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초가 위태롭게 일렁이고, 인선은 잠시 쉬어가자며 주저앉아버린다. 경하는 서울과 제주에 동시에 있는 인선을 바라보면서 인선이 되살아나려는 중일지, 자신이 죽어가는 중일지 궁금해한다. 경하는 눈을 감고 있는 인선을 보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갈라 나오는 피를 인선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성냥을 긋는다. 그러자 자그마한 사랑이 피어올랐다.


 작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우리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서 고통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엿보았다. 이 책은 고통이 자신을 버림으로써 타인에게 나아가길 강요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써의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은 역설적이게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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