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쌓인 나의 이야기

by 손정희

나는 책과 함께 자랐다.


집에는 엄마가 사 두신 세계명작 시리즈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목이 마음에 들어 손에 든 책이 재인에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은 터라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이 계기가 되어 나는 독서광이 되었다.


미친 듯이 세계명작을 찾아 읽었고, 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의 삶을 함께 아파하고 울며 읽어 내려가던 시간,


내 방 책장이 조금씩 채워질 때마다 밀려오는 뿌듯함과 행복감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세계명작이 서서히 시들해질 무렵,


나는 괴도 루팡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빠져들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 결국 잡히는 범인들의 모습은 늘 통쾌했고,


루팡도, 셜록 홈스도 내게는 너무나 멋진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결혼생활과 육아에 지쳐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은 수호지와 삼국지였다.


특히 삼국지 속 제갈공명과 조자룡은


내 지친 일상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존재였다.



암 수술 이후,


나는 책을 떠나 나의 시간과 공간을 걷기로 바꾸었다.


살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책과 거리를 두고 살아내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책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작고 예쁜 그림, 멋진 컬러로 꾸며진 빨간 머리 앤 (인디고 출판사).



책장을 펼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몰려왔다.


다시 중학생 소녀가 된 듯한 마음으로


빨간 머리 앤,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또 읽으며 주인공들의 감성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드니


노안으로 책 한 줄 읽는 일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이젠 오디오북으로 들어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괜찮다.


나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다시 삼국지로—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제갈공명의 멋진 모습과 함께,


한 줄이라도, 한 걸음이라도


책과 함께 나이 들어가리라.



책은 언제나 내 곁에서 웃고 울어 준 벗이었다.


앞으로도 그 벗과 함께 천천히, 그러나 깊게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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