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으로 흐르는 나의 걷기
걷는다, 나는.
아프면 아파서 걷고,
슬프면 울려고 걷고,
화가 나면 소리치고 싶어 걸음을 내딛는다.
이유를 너무 많이 갖다 붙여서 걷기도 한다.
그러다 한참을 걷다 보면
무념무상 속으로 스르르 빠져든다.
그 순간이, 참 황홀하다.
배낭에는 보온병 하나, 믹스커피, 삶은 달걀, 그리고 귤.
이 작은 준비물들이 나의 걷기를 한층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동반자들이다.
나의 걷기는 암 수술 후 항암을 하면서
체력이 바닥나 시작하게 된 운동이었다.
처음엔 전봇대에서 다음 전봇대까지 가는 게 목표였다.
그마저도 한 번에 못 가서
두세 번 쉬어가며 겨우 달성하던 저질 체력이었다.
2년 정도 동네 길을 걷다 보니
조금씩 걷기에 자신이 붙었다.
그래서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을 찾아다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책 한 권을 사서 하나씩 가보기로 했다.
나와 함께 걸어준 언니 덕분에 더 든든했다.
책 속에 소개된 멋지고 좋은 길들—
그 첫 시작은 경주의 보문호수였다.
그렇게 시작된 걷기는
제주 올레길, 부산 해파랑길로 이어졌고
시간만 나면 배낭을 메고 길 위에 나섰다.
길 위에서는 참 멋진 분들을 많이 만났다.
호숫가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쁜 마음먹는 거 아니지?” 하고
걱정스레 말을 건네던 노부부가 있었다.
길을 잘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모르는 아주머니가 한참을 같이 걸어주기도 했다.
길가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으면
“이것도 먹어보세요” 하며
고구마, 밤 같은 것을 슬며시 건네주던 분들도 있었다.
봄에는 벚꽃길을,
여름엔 초록이 우거진 그늘길을,
가을엔 아름답게 물든 단풍길을,
겨울엔 하얀 눈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걷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나 또한 건강해졌다.
그런데 내 인생에 또 하나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마치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진단명은 뇌경색.
지금의 나는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걷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사람이라는 것을.
보문호수를 시작으로,
다시 전국의 방방곡곡을
내 두 다리로 걸어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비록 예전처럼 힘차게 걷지 못해도,
뒤뚱거리며 걷는 지금의 걸음도
내 삶의 한 부분이고, 내 몸이 낼 수 있는 최선이다.
걷기란 결국 속도가 아니라
멈추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보문호수의 물빛을 바라보며
내 두 다리로 그 길을 완주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나를 데려가는 이 걸음을
조용히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