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발견

by Re나

오늘은 도서관에 가는 날. 평소와 다름없이 늘 걷던 곳으로 느릿느릿 향한다.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와 바람의 기척이 선명해지고, ‘으쓱’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서랍 한편 가지런히 챙겨둔 머플러와 장갑 그리고 따뜻한 비니와 핫팩 같은 겨울 아이템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도시의 윤곽이 서서히 흐려지고 소음이 잦아들면 가을 풍경이 절정에 이른다. 울긋불긋 다채로운 색채로 압도하는 풍경들 중에 반은 생명을 다한 듯 나뭇가지에 건조하게 매달려 있고, 또 다른 반은 바닥에 소복이 쌓여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고 나는 계절과 계절 그 사이를 우연히 스쳐 지나간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자연스레 눈이 감기면 보이지 않던 어떤 공간 속을 유영하며 자연과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어느덧 더 깊은 내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은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낸 채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이미 나는 겨울나무가 되어있었다. 겨울눈을 감싸 안고 앙상한 빈 가지를 드러내어 본연의 모습으로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견딜 나무들의 의연하고 기품 있는 기세에 이미 기가 죽어버렸다. 감싸 안을 겨울눈조차 부재한 것은 기다릴 봄이 없다는 절망과도 같으니까. 혹독한 추위와 기다림에 맞서 견디다가 그만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가을이 지나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자주 발걸음을 멈춘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에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은 한없이 더 느려지고 모든 감각이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한다. 자연의 소리가 나를 맑고 선명하게 깨우기 전까지 흐릿흐릿 풍경에 취해있었고, 오랜 어둠을 견뎌온 이의 긴 침묵 속에서 지나간 어느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울긋불긋 빛나는 색채로 모든 것이 물들어 버린 세상, 하늘과 땅이 하나의 계절로 뒤덮여 저 멀리 산마루 꼭대기에서부터 내 발밑까지 가을빛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잠시 멈춘 채 ‘후우’하고 깊이 한숨을 뱉어냈다.


가장자리에 둘러선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반짝이는 햇빛과 나무들의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섬세하고 눈부신 가을 공기의 무늬들로 마치 딴 세상으로 공간이동한 것 같은 기분에 취해버렸다. 깃털처럼 가볍게 공기층과 바람의 리듬을 타며 느리게 나선형으로 왔다 갔다 돌다가 벵그르르 낙하하는 한 장의 낙엽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광량이 충분치 않았는지 잎사귀 한쪽 끝은 연둣빛이 여전히 남았지만 노랗게 물든 나뭇잎과 잎자루와 이어진 선명한 줄기에 빛이 투과해 점점 더 투명해지더니 산책로를 물들인 낙엽더미 사이로 떨어져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하나 둘… 느리게 떨어지는 나뭇잎. 잠시 압도적으로 반짝하고 빛나는 존재로 나타났다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풍경 속에서 다른 풍경 속으로 존재를 감추어 버렸다.


<빛은 얼마나 깊이 스미는가>의 저자인 과학 저널리스트 사브리나 임블러는 몇 해 전 빛나는 젤리방울이 리스해변에 산더미처럼 좌초한 것을 발견했다. 생애 일부를 제 클론들에게 둘러싸여서 사는 군체동물인 해양생물 ‘살파’를 소개하며 리스해변에서 가방 볼품없는 구역이 왜 퀴어들의 것이 되었는지 소주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의 일부를 고백한다. 호기심에 ‘살파’의 정체를 검색하여 투명한 젤라틴질의 껍질을 가진 원통형 모양의 생물체 수백 개가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하나로 군체를 이루어 어두운 심해를 유영하는 사진을 발견했다. 군체를 이룬 살파는 투명한 몸체 속에 먹는 플랑크톤의 종류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선홍빛 내부 기관을 가졌고, 검푸른 심해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무척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살파는 거대한 나선형 군체를 이뤄서 제 클론에 둘러싸여서만 살지 않는다. 군체생활과 단독생활을 오가면서 살아가는데 혼자 움직이는 살파는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개체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분류도 어려워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 다른 생애를 사는 작고 투명한 유리 같은 몸체가 그물에 걸리면 산산조각이 나버려 연구자조차도 가급적 피하게 되는 존재였다. 거대한 군체를 이룬 살파무리가 방대한 바다를 뒤덮어 생태계를 위협하거나, 가령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레이건호의 냉각관을 침범하기 전까지 살파는 반가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퀴어로 삶을 살기 시작한 때부터 사브리나 임블러는 매년 6월이면 뉴욕집회에 참석한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퀴어들은 TERT 없는 세상, ICE 없는 세상, 제국주의 없는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쓴 피켓을 들고 소외되고 배제된 속에 살아온 각자의 느린 삶에서 함께의 기쁨을 즐기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무리 속에서 존재의 힘을 키워나간다. 무리 지어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2024년 12월 03일, 현직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 선포. 22시 50분, 그날 그 시간에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두 손은 자판 위에 우두커니 올려두고,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안되면 다시 읽던 책을 보고, 그러다 다시 노트북을 노려보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꽤 집중했던지 웃풍으로 방 안이 추운지도 몰랐다. 추위에다가 움직이지 않고 같은 동작으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손가락은 물론 어깨까지 온몸이 굳어있었다. 늦은 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야, 계엄이래!”


심장이 쿵쾅쿵쾅, 등골이 오싹.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던지 두통을 동반한 통증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덜덜 떨면서 베란다로 나가서 바깥상황을 살펴보고 쥐 죽은 듯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스러운 말을 뱉어내며 뉴스를 켰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어이없는 실제상황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앉아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국회로 달려와준 놀라운 시민들 한 분 한 분의 모습에 걱정과 안도라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11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이에 헌법 제77조 5항에 따라 대통령은 즉시 비상계엄을 해제해야 하며, 계엄선포가 무효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극도의 공포감을 잠시 내려놓았다. 몰려오는 어깨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따뜻한 침대 속에 들어가 뉴스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끝을 모르는 혼돈은 지속되었다. 정상적 범위에서 한참 벗어난 국가의 폭력 앞에 무기력한 분노를 느끼고, 상식과 헌법의 오염 앞에 여러 번 좌절했다. 사회 속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무너진 상식과 불합리한 시간의 고통이 함께 밀려와 한동안 공황상태가 지속되기도 했다. 쏟아지는 뉴스 앞에서 소비한 시간과 감정, 그 피로감으로부터 여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나의 일상은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작은 일기>는 아주 우연히 발견했다. 평소에 서점 베스트셀러를 궁금해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어떤 책이 잘 팔리나!’하고 가끔 들여다볼 때가 있다. 신간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작은 일기>는 그렇게 만났다. 지금은 <백의 그림자>, <연년세세>까지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지만, <작은 일기>로 황정은 작가를 알게 되었고, 작가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작은 일기>는 계엄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 매일의 일상을 일기로 기록한 에세이이다.

함께 지나온 고통의 시간이지만 작가의 기록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거리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현장에서 함께 추위를 견뎌온 사람들, 분노와 절망을 함께 견뎌온 사람들, 희망이 불씨를 키워가며 미래를 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거리와 책상 앞을 쉼 없이 오가며 길고 어두운 시간을 견뎌온 감정의 진폭이 나와 다르지 않았고, ‘상식과 일상의 붕괴’를 기록한 담담한 일기를 읽으며 나는 지난 1년을 작가의 공간과 시선 속에서 다시 살아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탄핵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집회 현장의 시민들, 거대한 집단의 빛의 혁명 속에 사라진 작고 놀라운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거리에서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과 놀랍고도 감사한 마음이 더 커져만 갔다. 상상도 하기 싫은 지난 기억들이 작가의 글 속에서 즐겁게 읽혔던 건 다분히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함께 모여 이루어낸 일단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이겠지.


가을풍경 속 낙하하는 나뭇잎 한 장이 순간과 빛의 혁명 속 작은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순간도 나는 더 생생하게 기억해 둘 거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