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소식을 들으며 걷는다는 것은 나의 계절로 들어서는 길이다. 자꾸 발걸음을 세우는 연둣빛 새싹이 꿈틀대고 화려한 꽃들이 눈가에 가득 들어차며 서늘하고 경직됐던 몸과 마음에 체온을 데운다. 온화한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면 나도 모르게 향기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리거나 아는 향기의 주인을 자연스럽게 읊으며 스르륵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잠시 곁을 머물다 사라질 풍경들을 상기된 마을을 즐기며 허공으로 손을 들어 눈부신 햇살을 걷어내고 내 눈 안으로 움켜쥔다.
저토록 눈부신 몸짓들에 현혹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잊지 않고 돌아온 계절의 꽃들과 아낌없이 만나 전율하기도 전에 상실감에 젖어 들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린 마음을 달래고 있는 나는 온 마음을 던지고 비워내어도 지금을 살아내지 못하는 갈길이 먼 일상의 수행자로 다시금 겸손해진다. 사라지고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짧기 때문이라고 어두웠던 시간들에 대한 투정이라고 바람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재촉한다.
봄의 심란을 잠재우는 새하얀 빛으로 만발한 목련나무 한 그루 앞으로 밤낮없이 찾아가는 것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
김훈 작가님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문장은 따로 메모해 두었고, 나는 목련나무를 좋아한다.
두 눈을 감지 않고서도 내면 깊숙이 침잠하여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다시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자연의 소리를 채우고 자연의 시간에 편입되어 편안하고 고요한 호흡으로 돌아가는 시간. 1년을 기다려 고작 일주일을 꽃피워 살아가는 그 짧은 생애 앞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피어나 담대하고 귀품 있는 자태를 유지하는 평정심 앞에 오만방자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미술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 중 하나로 알려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보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귀도 레니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수석보조의 딸 알리자베타 시라니가 그린 모사작 ‘터번을 쓴 여인’이다. 새하얀 드레스와 터번을 쓴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인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소란스럽던 마음이 겸허해진다.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금 당장 허물어져도 좋을 듯한 허탈한 표정이 그윽하게도 몹시 빛난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라 뺨으로 또르륵 흘러내리면 습관적으로 호흡 속으로 도망쳐 감정을 누르고 애써 만들어낸 고요 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씹어 삼켰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희망회로는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다 좋아질 거라는’ 익숙한 메아리가 울려 희망의 도파민이 제대로 작용하면 예민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상 습관을 만들어가고, 수행이 안정적으로 접어들어가던 어느 날, 여의도 모처에서 저녁수행을 마치고 돌아와 노곤해진 몸을 침대 속에 뉘어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았다.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은 당혹스럽게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견뎌왔던 단단한 마음들이 일순간 와해되어 아무리 비워내고 비워내도 복잡한 실타래로 뒤엉켜 버린 광기 어린 삶 속으로 내던져져 내 몫의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펑펑 울었던 날이다. 가슴으로 뻗어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숨을 쉴 수 없어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다른 한 손은 침대 매트리스를 둔탁하게 내리치며 울부짖음에 가까운 몸짓으로 소리를 쏟아내며 울었다. 심장이 부풀어 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과 내면에 응집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동안 이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는 전투력은 이미 상실했다. 나의 왼쪽 가슴 아래에는 알 수 없는 작은 실핏줄의 흔적이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 알겠어! 이렇게나 많이 힘들었구나!’
’ 괜찮아, 괜찮아, 많이 힘들었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게 같은 자세로 원 없이 울면서도 또 다른 구원이 있다는 위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생명을 삶을 명징하게 바라보았다. 몸을 잃어버리고 영혼을 상실한 것처럼 그 후로도 같은 증상은 반복되었고 삶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바로 하고 티슈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한 꺼풀 허물이 벗겨져 나간 듯 폐부깊이 스며드는 잔잔한 호흡을 바라보며 가슴에서 번지는 투명한 희열에 힘없이 축 처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미소가 찾아들었다.
아마도 기묘한 황홀감에 눈을 감고 금세 잠이 들었었지!
‘터번을 쓴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숱한 어려움과 고통의 눈물 속에서도 이날이 떠오른다.
알리자베타 시라니의 작품 속 여인은 로마의 명문가 첸치가에서 태어난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여인이다. 로마에서 엄청난 난봉꾼으로 알려진 베아트리체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첸치는 다른 남자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베아트리체를 탑에 가두었고, 자신의 딸의 육체를 상습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한창 아름답게 꽃 피울 나이 22살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많은 군중들이 모였고 그 자리에 그림의 원작 작가 귀도 레니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후 작업실로 돌아와 그린 그녀의 초상화이다.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보다 알리자베타 시라니의 베아트리체가 더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덜 붉은 입술과 뺨의 홍조, 그리고 더 풍성한 새하얀 드레스와 터번 때문이 아니라 어딘가를 응시하는 처연한 눈빛 때문이고, 화가 역시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의문의 죽음으로 2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거다.
어쩔 수 없이 툭하고 떨어지는 더 견고하게 빛나는 한송이 목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