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이라는 느린 사유의 몸짓

by Re나


오랫동안 걷다 보면, 삶이란 거대한 강물보다도 한 사람의 보폭만큼의 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길은 늘 앞에 놓여 있으나, 그 길을 어떻게 건너가는지는 걸음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고 섬세한 어떤 감각이 결정하는 듯하다. 목적이 없어도 흐르고, 목적이 없기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시간.


아침 공기를 가르는 첫 걸음은 가겹고 늘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하루가 막 태어나 자기의 형태를 갖추기 전, 잠시 머물러 있는 희미한 미명과도 같다. 그 속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방향과 기미가 들어 있고, 나는 그 고요한 틈 사이로 조심스레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공기가 내 안으로 스며들어 오래된 무언가를 아주 가늘게 흔든다. 산책을 오래 하다 보면, 이 스침이야말로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가장 작은 기폭제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길가의 나무들은 계절에 맞춰 잎을 피우고, 또 거두어들인다. 나는 그 반복을 바라보며, 나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피워 올리고 또 저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무는 한 번도 자기의 속도를 서두르지 않지만, 그 느림은 결코 정체가 아니며, 그 느림 속에는 시간이 씨앗처럼 잠겨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조금씩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간다. 나는 그 움직임을 닮고 싶었다. 흔적 없이 조용하지만, 간결하게 자신의 길을 마저 걸어가는 어떤 방식을.


걷는 동안, 나는 늘 두 가지 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발끝에서 바닥으로 번지는 미세한 마찰음, 다른 하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느리게 올라오는, 이름 없는 감정의 파문이다. 산책이란 결국 이 두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리듬이 서로를 알아듣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그 순간은 늘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지만, 도착하고 나면 겨울을 지나온 나뭇가지처럼 무척 단단해진다.


해가 천천히 이동하는 길 위에서 나는 종종 시간을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시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과의 거리를 허락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책의 순간은 늘 이러한 거리에서 피어난다. 한때는 무겁게만 느껴졌던 생각들이 바람 한 번에 가볍게 뒤집히고, 붙잡기 어려웠던 감정들이 걸음의 리듬 속에서 어느새 말랑해진다. 때로는 아무 의미 없던 풍경이 문득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묘한 순간도 찾아오고, 그럴 때면 나는 그저 고개를 숙여 걸음을 이어나갈 뿐이다. 감정의 실체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풍경의 무게를 해석하려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이어간다.


걷기는 삶이 '정리'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생각을 깨닫게 한다. 정리하려 할수록 뒤엉키고, 흐름을 허용할수록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는 것들. 바람은 늘 바람의 방식으로 길을 열고, 물결은 물결의 속도로 모양을 만든다. 걷기는 그 흐름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 흐름 속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다.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와 다르다. 무게를 잊었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내가 지닐 수 있는 만큼만 들고, 나머지는 길에게 맡긴다는 작은 허용일 뿐이다.


해 질 무렵의 길은 하루 중 가장 빛이 얇아지는 시간이다. 그 빛 속을 걸을 때면 내가 하루의 경계선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명료함과 흐릿함이 함께 존재하는 시간. 태어난 것과 사라지는 것이 함께 흔들리는 시간. 나는 일몰의 시간과 함게하는 산책을 아끼고 오래 사랑해왔다. 이유를 묻자면 대답은 늘 비슷하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도 괜찮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은 늘 이 '괜찮음'을 가르친다. 미완의 삶도, 흐릿한 감정도, 닿지 않는 미래도 모두 괜찮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온종일 흩어진 생각들을 굳이 정리하지 않는다. 산책은 결론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리되지 않은 채 떠다니는 생각들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처럼 제각각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흘러감 속에 나도 함께 실려 간다. 느리게 쌓여가는 걸음의 결로, 특별한 이유 없이, 아무 결론도 바라지 않고, 그저 길이 나를 이끌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살아난다. 나는 내일도 걷는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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