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
조모 선생 폭력사건 - 사실과 진실
2007년 3월에 모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진짜 있었던 일이다.
<진짜 있었던 일=사실>
조모 선생이 야구몽둥이로 학생들 머리를 때리는 사건이 있었다. 조모 선생이 야구몽둥이로 다섯 명의 학생들 머리를 때렸는데, 학생들 머리에서는 흰 피, 노란 피, 초록 피, 무지개 피, 파란 피 등이 날렸다. 한 학생의 머리에서는 피가 빨리 떨어지지 않았다. 조모 선생은 피가 날릴 때까지 때렸고 결국 교실은 피바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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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사실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을 온전하게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사실을 온전하게 언어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진짜진짜 있었던 일=진실>
조모 선생이 야구몽둥이(종이에 야구몽둥이라고 적은 것)로 학생들 머리를 때리는 사건이 있었다. 조모 선생이 야구몽둥이로 다섯 명의 학생들 머리를 때렸는데, 학생들 머리에서는 흰 피(종이에 흰 피라고 적은 것), 노란 피(종이에 노란 피라고 적은 것), 초록 피(종이에 초록 피라고 적은 것), 무지개 피(종이에 무지개 피라고 적은 것), 파란 피(종이에 파란 피라고 적은 것) 등이 날렸다. 한 학생의 머리에서는 피가 빨리 떨어지지 않았다.(종이가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조모 선생은 피가 날릴 때까지 때렸고 결국 교실은 피바닥이 되었다.(종이가 교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언어로 표현된 내용을 보고 듣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언어로 표현된 사실은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아마도 언어 자체가 가진 애매성과 관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가진 이해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는 항상 과거의 기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배우거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 행태일 것이다.
<진짜 있었던 일>이 기사화된다면 아마도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폭력 교사 물러가라. 학생들을 야구몽둥이로 때리는 교사는 퇴출시켜야 한다. 그런데 학생들 머리에서 흰 피, 노란 피, 초록 피, 무지개 피, 파란 피 등이 날렸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불교를 공인할 때 이차돈의 몸에서도 흰 피가 솟았다는데, 그 학생들은 폭력적인 한국 교육의 현실에 희생당한 순교자들이다. 진짜 흰 피, 노란 피, 초록 피, 무지개 피, 파란 피가 있을까? 혹시 그 다섯 명의 학생들은 외계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등등의 생각이 난무할 것이다.
<진짜 있었던 일>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현장을 방문하여 사람을 만나보고 눈으로 귀로 확인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진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을 방문하기도 어렵고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다. 현장을 방문하여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언어가 있다. 우리는 언어를 분석하여 사실의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언어 속에는 사실과 진실이 들어있다>
언어는 상징이다. 언어는 음성상징이며 시각상징이다. 상징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의 말을 듣는 다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는 본질적인 한계를 가진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한하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유한하다. 그러므로 말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이 무한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묵언(黙言)을 한다. 이처럼 묵언을 하는 이유는, 무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유한의 말을 소멸시키면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말이 사라지면 사실이 진실이 된다. 개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이 진실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개는 배가 고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음식을 먹는다. 그런데 인간은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말을 한다. 배가 고프다고 말을 하는 순간 사실과 진실이 분리되면서 고통이 배가 된다.
그리고 사실과 언어가 일치한 상태는 진실의 상태이다. 즉 언행일치(言行一致)는 과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것’으로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언어로 진실을 담는다면 그것은 사실인 것이다. 사실과 언어와 진실이 일치하면 아름다운 일이지만,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사람의 삶이 복잡해지고 아름답지 못한 일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상징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상징이 생성되는 과정은 아마도 단순한 것이 아닐까? 만약 부처님이 빨래판 모양의 나무 위에서 수행을 하시고 설법을 하셨다면 불교의 상징은 빨래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 지붕에는 빨래판을 걸고 보살님들은 예쁜 빨래판을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았을까? 만약 공자님이 빨래판 모양의 나무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면 유교의 상징은 빨래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균관 지붕에는 빨래판을 걸고 유학자들은 예쁜 빨래판을 만들어서 허리에 차고 다니지 않았을까? 만약 예수님이 빨래판 모양의 나무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셨다면 기독교의 상징은 빨래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지붕에는 빨래판을 걸고 신도님들은 예쁜 빨래판을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았을까? 세상의 더러운 때를 정화하는 빨래판의 덕(德)은 세상의 악을 정화하는 종교의 덕(德)과 같으니 빨래판을 예쁘게 디자인하여 목에 걸고 다닌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언어가 사라지면, ‘사실=진실’이 된다. 이것이 여여(如如)의 경지가 아닐까? 언어가 사라지면, ‘행(行)=진실’이 된다. 행위예술은 행(行)으로 진실을 보여준다.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 행위예술이다. 이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무슨 구질구질한 말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동물’이다. 상징이 사라지면 개처럼 단순해진다. 이것도 좋은 일이지만 개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언어를 잘 살피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언어를 분석하는 것은 언어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사실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잘 살펴야 한다. 실체적 진실 찾기는 참으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