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슬퍼합니다. 나는 부끄러워합니다. 나는 애도합니다.
방학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기쁘게, 유쾌하게, 한 학기를 마무리 한다는 속시원한 마음으로 다음 학기에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교무실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업무를 처리하고 동료 선생님들과도 한 학기를 잘 지내왔다는 인사를 하며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디선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교사'라는 꿈을 안고 아이들 틈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교실에서 사랑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을 법한 소중한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었습니다. 관련 기사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쏟아졌습니다. 수많은 이야기 틈바구니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물음을 계속해서 떠올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짓눌리는 듯한 감정과 어지러움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애도하는 마음을 깊숙하게 새기며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저의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봤습니다. 하지만 지탱하려 했던 일상은 이전에 느끼던 일상과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토해내듯 글을 써야 할 것 같았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글과 말로써 이 마음을 담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이제야 저는 며칠 사이의 제가 느낀 것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계속 '부끄러웠'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누군가는 이 상황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법한 모습들에 맞서 추모하고 애도하며 무너진 우리의 마음들을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말들 중에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이 너무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은 '나도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다음은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말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저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말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에 슬픔을 느낀 것 이유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응원의 말씀을 보내주시는 학부모님들 덕분에, 교사로 살면서 힘든 때도 많았지만, 지나고보니 견딜만 한 것들이었다며 생각해왔던 시간과 경험들이 쌓인 것이 저의 '노력'보다 '운' 덕분이었을 수 있다는 '찰나의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는 말을 들어야 마땅한 시간과 경험들이 층을 이루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조 섞인 말을 우리 스스로 내뱉고 있다는 현실이 슬프기만 했습니다.
사랑스러운 학생들과 고마운 동료들과 학부모들을 만나는 것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우연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지탱하며 교사로서의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은 '운'이 아니라 교사들의 '노력'입니다. 숱한 노력들이 가까스로 교사로서의 생애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버티던 시간들에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그 노력의 가치보다 운이 더 인정 받게 되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운이 좋아 살아 남아 있다는 이 가슴 아픈 말을 교사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무관심 또는 의도된 외면, 혹은 왜곡되고 뒤틀린 마음과 행위들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가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Sense of Shame은 '부끄러움'이라고 읽히지만 사실은 '수치심'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책이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사의 경계에서 돌아온 프리모 레비가 그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것은 안도감 섞인 동의가 아니라 Sense of Shame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희생자들을 죽음으로 이끈 시스템과 제도, 흘러오지 말았어야 할 시류에 파묻힌 '이름이 없어진 사람'들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을 '운'이라는 단어로 부정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남은 생을 뒤덮은 감정에 비할 바가 아닐진 몰라도, 저는 교사들이 스스로의 '노력' 대신 '운'을 이야기하도록 만든 이 Sense of Shame을 슬퍼합니다.
앞서 제가 느낀 '부끄러움'은 Sense of Shame입니다. 교사로서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 중에 이런 감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야 마땅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고 부당함에도 버텼으며 무엇이 우리를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는가를 고민했을 수많은 교사들이 쌓아온 '노력'은 '운'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가 스스로의 '노력'을 '운'에 기대어 말하도록 만드는 상황은 더이상 찾아와서는 안 됩니다. 애도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는 정지 상태라던 롤랑 바르트의 말을 되새기며 떠나간 이가 남겨둔 자리에 더이상 애도가 차지할 자리가 남아 있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