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24년 12월 3일의 밤은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지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집안을 감돌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역사를 공부한 세월을 초등학교 3학년 때즈음을 기점으로 삼는다면 나름대로 25년간 역사 공부를 해왔던 저에게 그 단어는, 말 그대로, 책과 미디어에서만 등장하던 과거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밤, 아내가 먼저 소식을 접하고 저에게 이야기할 때만 해도 처음엔 흔한 '가짜 뉴스'쯤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재차 소식을 전하자 그제야 뉴스를 시청하였고, 이후에는 밤을 꼬박 새듯 뒤척이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역사를 공부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깊이가 얕을 수 있으나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지 8,9년이 되어가는 해에 맞이한 그 날은 역사 교사로서 어떻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마주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하며 호기심과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아이들, 뉴스를 통해 살펴보긴 했으나 정확한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 학교에 와서야 소식을 듣고 놀란 토끼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아이들, 아직은 어린 나이여서 그런가 그저 해맑기만 한 아이들 등 이 작은 공간에 어쩜 이렇게도 반응이 다른지 신기하면서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어찌저찌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할' 이야기만 나눈 후 우리의 일상이 지켜져야 함을 당부하는 시간이 얼마간 이어졌습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그 단어와 그때, 그 시절 이야기가 현현되는 것을 본 아이들에게 큰 역사 공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반복될 뻔했던 그 역사를 너희가 겪을 뻔했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역사적-비판적 사고력, 역사 문해력 등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사례를 들어 설명해왔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잔소리 같지 않은 잔소리보다 2024년 12월 3일과 그 이후의 경험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와닿았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색하게 느껴졌다 해서 허무하거나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 한강 작가가 질문을 되짚었다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었기에 제가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 범위 안에서 꽤 깊이 있고, 양쪽의 입장을 가능한 한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수업을 하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 안에서 제가 지켜야 하고, 지키고 싶은 정치적 중립의 대상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잠시 허망함을 느끼긴 했지만 말입니다.
한강 작가의 질문은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생각나게 합니다.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게 합니다. <역사 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이 이야기한 진정한 과거의 상(像)과 그것을 포착하기 위한 역사가의 노력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학자로 살기보다 교육자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후 '현생'을 사느라 잠시 놓치고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2025년을 맞이한 새해에 제 머리와 가슴을 어지럽힙니다. 한강 작가가 되짚은 질문에 대해 함부로 답할 수 없지만, 발터 벤야민과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로부터 답에 가까워지는 길은 다시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