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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25

"카뮈의 말처럼 세상은 아름답다. 그것 말고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by 박예정

라파엘 앙토방의 <오후 3시 -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 이태원의 한 카페의 한 구석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을 집어든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카페 사장님이 키우던 큰 개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마침 그때의 시간도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제가 그 시간, 그 공간에 있는 것과 책 제목이 괜히 이어지는 것 같아 무심결에 책장을 넘겼습니다. 지은이가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그가 쓴 저서의 문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책'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삶에 대한 통찰력과 본인의 경험이 어우러진 한 편의 에세이의 문장 같았습니다. 단숨에 책장을 여러 페이지 넘기다보니 꼭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 서점에서 바로 구매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보다 문장을 수집하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그 시간 속의 저는 여러 번에 걸쳐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가는 놓쳤었던 좋은 문장들을 다시 정리하고는 했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던 독서의 오래된 격언을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이 책으로부터 출발해 에세이에 대한 저의 오래된 편견 같았던 것들이 무너졌습니다. 이후의 제 독서는 여러 갈래르 뻗어나갔고, 그 궤도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선에서 새로운 작가와 문장을 찾는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첫'이라는 순간과 대상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만 이후에는 미화되거나 퇴색되어 변질된 기억을 안고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카뮈라는, 독서를 하거나 했던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그 유명한 작가의 말을 인용한 저 문장이 왜 그렇게 뇌리가 깊게 박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니, 어린 시절의 치기가 넘치던 때의 시선과 관점에서 자라는 모가 조금씩 마모되어 사라짐을 느끼고, 조금은 동그란 마음을 갖게 되어가는 저를 발견할 때즈음 저 문장을 유독 더 많이 읽었던 기억은 있습니다. 카뮈가 말했다던 저 문장의 함의는 동그란 마음보다는 날카로운 통찰이 더 잘 어울리겠지만 말입니다.


가슴 답답한 소식들이 가득하고, '상식'에 비추어 바라보면 세상은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거라는 막연한 믿음에 상처가 나는 요즘입니다. 제 글에 언제나 등장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의 힘이 약해짐을 느끼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사회적인 이슈외에 개인적인 일들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힘이 약해졌을 뿐 끊임없이 던져야 할 말들이 다시 키워갈 마음의 힘은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도 카뮈의 말처럼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구원은 이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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