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회화의 시대에 산다
현 시대 시각예술의 지형은 이미지의 범람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와 발전 속에서 회화는 여전히 동시대를 그리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즉, 그 시대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표현하고 담고 있는 회화는 여전히 동시대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그만한 매체로서 정신적, 물질적 융합을 가장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회화의 시대》는 회화의 지속성과 동시대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다섯 명의 작가—김유진, 김수진, 김유경, 남서정, 반소현—의 회화를 통해 지금이 과연 회화를 필요로 하는 시대인가 아니면 회화를 소비해야 할 시대인가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회화는, 인류가 손을 통해 무언가 발견을 하고 발명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록으로 또는 감정의 표현의 수단으로 지금의 기술과 문명의 발전과 같이해 온 몇 안 되는 인류만이 가질 수 있는 매체였다. 사고를 담고 그 사고의 깊이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인류가 언어로 소통하기 전부터 서로를 읽고 느낄 수 있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매체였다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다는 의지로부터 회화는 시작되었고, 인류는 소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회화의 시대’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과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얼마나 솔직하게 바라보고 그려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작가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김유진은 사건의 기억과 감성적 파편을 수집하듯 화면을 구성한다. 그는 구체적인 인물과 배경을 배치하지만, 그것들이 지시하는 바는 특정한 서사보다도 ‘기억’이 남긴 순간의 잔상에 가깝다. 인물은 우리의 감정을 대변하는 존재로 등장하며, 그 인물의 배경은 기억의 공기와 빛, 그리고 당시의 감각한 것들을 기록한다. 회화는 그에게 있어 잊혀짐 이후에도 지속되는 멜랑콜리한 감각의 지속이며, 사진으로 비롯된 장면이지만 그것을 통과한 감정의 층위를 담아내는 일종의 우주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감각적이고도 정서적인 ‘기억의 장면’을 기록하는 회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
김수진은 인물 즉,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직접적인 감정의 고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직접적인 감정들이 배제된다. 감정이 배제된 신체, 특히 발과 다리, 조각상이나 동물의 이미지 등을 통해 감정의 비가시성을 표현한다. 감정의 객관성을 표현함으로써 의도되지 않은 서사와 장면을 구성한다. 그의 회화는 이미지의 수집과 재조합이라는 과정에서 비롯된 시뮬라크르적 풍경이자, 디지털 시대 이미지 소비의 단면을 반영한다. 동시에, 회화적 텍스처에 대한 섬세한 탐구를 통해 장면의 감각적 밀도를 부여하며, 열려진 서사로서 작가의 회화의 시대를 실현한다.
김유경의 작업은 ‘까마귀 인간’이라는 상상적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인간과 새의 경계에 위치한 이 존재는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감각과 사유의 방식을 체득하며, 그 과정을 회화와 드로잉, 텍스트로 기록한다. 그의 작업은 일기적 서술과 회화적 구조가 교차하며 구축되며, 현실과 비현실, 서사와 추상의 경계 위에 선다. 복합적인 시각 구조와 상상력의 조형화를 통해 그는 회화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게 한다. 이는 감정과 상상이 중첩되는 내밀한 공간을 관객에게 제안한다.
남서정은 회화의 물질적 속성을 사고의 핵심으로 삼는다. 화면 위에 물감을 바르고 밀어내고 다시 덧입히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감각과 감정의 밀도를 탐구한다. 그의 작업은 서사나 상징으로 이루어지는 구성보다, 감각적 반응과 직관적 사고에 기반한다. 회화 그 자체의 긴장 속을 통해 형상들을 찾는다. 회화는 그에게 있어 고립된 사유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내면과 외부 세계의 접점을 찾는 자율적인 장이다. 이로써 작가의 화면은 비가시적 사유의 흔적이면서, 역동적인 감각의 향연으로서 회화의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
반소현은 우연과 충돌, 감정과 행위의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면서 회화를 구축한다. 상징적 오브제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났다가 어는 순산 사라지면서 만들어지는 화면은 처음부터 명확한 서사를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회화적 제스처를 통해 겹치고 쌓이는 색들이 그의 사고와 감정이 이끌고 있는 서사를 대신한다. 그의 작업은 일련의 반복과 흐름 속에서 구성된 ‘감각의 조형’이며, 그리고 있는 순간의 직관과 본능적 감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회화는 그에게 있어 내면적으로 물들어 있었던 감각을 외부 세계로 향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시각적 활동의 공간이면서 사고를 시각화할 수 있는 회화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회화의 시대》는 매체로서의 회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막연하고 뒤 늦은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회화가 오늘날의 예술적 실천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다섯 작가의 서로 다른 회화적 언어를 통해 회화는 늘 우리의 삶과 함께 해 왔으며 그 삶의 시대를 잔잔하게 혹은 강렬하게 대변해 왔음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우리의 회화는 어떠한 감각을 기록하고 어떤 존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아직도 ‘보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 졌으면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이 곧 내가 그려내야 할 시대라는 것. 어쩌면 작가가 붓을 들게 되면서 가장 먼저 부딪쳐야 할 숙명이었을 것이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