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선 작가
시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는 보는 사람의 의지가 담겨있다. 의지가 곧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보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시각예술은, 보는 행위를 통해 발전되고 기록되어 왔음을 전제로 한다면, 수 없이 많은 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시선들의 에너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따라서 작가로 인해 창작된 모든 시각예술은 보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함께 정의되고 존재의 가치가 만들어져 왔음을 감안한다면, 그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보고자 하는 에너지의 또 다른 발산이다. 이러한 시각적 에너지의 응집과 교류야 말로 미술의 근본적인 의미를 만들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지선 작가의 시선은 그가 바라봤던 매 순간들의 기억과 이어진다. 그 기억은, 그의 일상 속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또는, 자신의 삶이 스스로 던져놓은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들로부터 구성된 기억들. 혹은 경험들. 하지만 무의식처럼 기억되고 있는 그 순간들에는 항상 작가의 시각적 에너지로부터 무언가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는, 작가가 보고자 했던 일상의 장면과 그 일상의 장면에 놓여 있던 사물들과의 관계를 보다 더 체계적이면서 구조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근거이기도 하다.
회화에서 평면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이제 좀 지루하다. 회화는 평면 그 자체라는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논외가 될 정도로 회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보편적인 진리였다. 그런 의미로 평면성을 지향하고 있는 회화는 어쩌면 회화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회화의 화면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우주와 같이 넓은) 그 위에, 서지선 작가의 정지된 일상이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 보이는 이유 역시, 평면성으로부터 답보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작가의 평면은, 그의 시선으로부터 여러 가지 보고자 하는 위치에 놓여진 사물들이 쪼개지거나 부분부분 그 자체로 달리 보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평면은 평면이기보다 그 평면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이 겪었을 사건과 사고들을 오히려 더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건과 사고는 작가와 혹은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그 순간들이고 기억이다. 그때 그 사건을 겪었던 것은 나 뿐만 아니라 그날 건드렸던 컵이, 술잔이, 또는 그날의 음식들이 다 같이 겪었다는 것.
그날의 기억이 미치도록 슬프거나 들뜨거나 한없이 즐거웠다고 해도 그 감정의 기억은 곧 기억에서 담담해진다. 하지만, 그날 그때 그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장면들, 사물들은 그 담담 해져버린 기억들을 생생하게 만드는 메신저가 된 적이 있다. 잃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실마리 처럼.
이런 의미로, 서지선의 정지된 순간의 장면들이 너무나 평면적이었던 만큼, 그 정지된 순간의 장면들이 객관적으로 그가 바라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의문을 쫓을 수 있을 것 같다. 평면으로 쪼개놓은 각각의 사물들의 색 면들도 그렇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들이 한 사물에 동시에 드러남으로 인해 작품의 평면성은 더 극대화 된다는 점. 따라서 그의 눈에 혹은 기억에 존재하는 장면들은 끝없이 흔들리고 겹쳐지는 우리 일상이지 않을까.
어느 날 내가 만진 그 컵과 그릇들에 베여있을 내 감정과 그 때 막연하게 내 삶의 미래를 결정했던그 순간. 나와 함께 있었던 그 장면과 사물들이야말로 어쩌면 지금의 나를 나로 만들어 왔던 필요 조건이었을 것 같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 소소하게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과 사물들. 그리고 그것들과의 경험과 기억 이것은 절대 순간이라고 멈춰있을 수 없다. 지속적으로 내가 살고 있음으로 그 일상의 어느 순간 떠오른다면 그 장면은 절대 멈춰있을 수 없다. 나의 기억과 나의 삶과 함께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을 살고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