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케이크 상자, 17년 고속도로

by 서초동 김원장



아이들 아빠와 옛 회사 동료였던 분이 계신다.

그 인연으로 시작해, 내게 17년째 머리를 맡기고 계신
오랜 단골이다.

이제는 아이들 아빠와 특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고,
회사도 집도 이곳과는 꽤 거리가 멀다.

굳이 이 멀고 작은 미용실까지 오지 않으셔도 될 텐데,
그분은 여전히 변함없이 찾아오신다.

그리고 늘, 한결같은 목소리로

“형수님”

이라 부르며 케이크 상자를 내민다.

사 오지 마시라고 몇 번을 말려도
내 의사는 단 한 번도 반영된 적이 없다.

17년째 같은 베이커리의 거의 같은 케이크.
단 한 번도 빈손으로 오신 적이 없다.

이 정도면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그 기쁨 자체가 커서
사 오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나는 그분께 대단한 헤어스타일을 해 드리는 것도 아니다.

계절마다 스타일을 바꿔 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실 때마다 이야기를 들어 드리고
매 순간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산할 때면 늘 파마 비용을 내고 가신다.

커트만 하신 날에도,
“오늘은 커트만 하셨잖아요.”라고 말려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분은 늘 파마 비용을 얹어 두고 가신다.

이 고집스러운 결제 방식에도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과분한 정성 앞에 서면
가끔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도대체 내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셔서
이 긴 세월을 찾아주시는 걸까.

혹시 옛 인연 때문에 의리로 오시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17년은 결코 의리 하나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분이 다녀가신 날 퇴근길,
내 손에는 늘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다.

아이들은 상자만 보고도 바로 안다.

“엄마, 그 삼촌 왔다 갔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뜻밖의 작은 파티를 연다.

그분의 절친 중에는 더 놀라운 손님이 있다.

대전에서 서초동까지 머리를 하러 오시는
일명 ‘대전댁’ 가족이다.

아내와 두 따님까지,
머리를 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총출동한다.

대전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달릴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이 가족 역시 첫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돌이 되기 전, 배냇머리를 잘라 고이 보관하시겠다며
조심스럽게 일부를 잘라 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아이가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이 가족을 보면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머리를 하러 오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복닥복닥 준비했을 모습,
차 안에서 웃고 떠들며 달려왔을 시간들,

그 먼 길을 달려오고도
미용실 의자에 앉아 환하게 웃는 가족을 보면
일상이 곧 행복이라는 걸 배운다.

재미있는 건 이분들의 스타일이다.

아내와 따님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정하지만,
아빠 고객들은 정반대다.

케이크 손님은 거친 호일펌 스타일이고,
대전댁 고객님은 일명 ‘베토벤 머리’, 혹은 ‘예수님 머리’라 불리는
파격적인 스타일이다.

한 분은 유명한 기업의 임원이시고,
한 분은 내로라하는 공학 박사님이시다.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임원이나 박사의 모습은
짧고 단정한 머리다

그래서 가끔은
‘정말 이렇게 해 드려도 되나’ 싶어 공범(?)으로서 살짝 염려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머리를 하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내가 더 신이 난다.

누가 임원은 단정해야 한다고 정했을까.
일만 잘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우리 미용계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더 세게,
더 화려하게,
더 살벌하게(?) 볶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안 비밀이다.

17년째 케이크를 들고 오는 손님과
17년째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가족.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내게 건네는 것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

그 믿음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이 소중한 인연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단 하나다.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

케이크 상자에 담긴 온기와
고속도로를 달려온 차 안의 웃음소리가
오늘도 내 가위질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는다.

17년째 서초동 작은 동네 미용실을 믿고 찾아주는
이 고집스럽고 따뜻한 사람들께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본다.

정말, 미치도록 감사하다고.

작가의 이전글궁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