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따라 동네 미용실에 찾아온 낯선 외국인 손님의 신뢰
요즘 내 미용실엔
외국인 손님이 부쩍 늘었다.
예전에는 아시아권 손님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서양인들의 예약 문의도 자주 들어온다.
K-팝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K-뷰티의 바람이
내 작은 골목 미용실까지 밀려왔다.
외국인 손님들도 이제
"가르마파마’, ‘디지털파마’, 같은 한국식 (미용) 전문 용어정도는 알고 있다.
원하는 스타일 사진을 보여줄 때도
동양인 모델 사진을 가져온다.
그럴 때마다 실감한다.
정말 K-뷰티가 세계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구나.
우리나라 미용 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지 오래다.
월드클래스 대회에서 1.2위는 기본이고,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의 아카데미와
브랜드 진출은 이미 10년도 훨씬 전 이야기다.
예전에는 우리가 배우러 갔다면,
이제는 그들이 우리 기술을 배우러 한국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외국인 손님이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서양인의 머리를
펌과 염색까지 했던 날이다.
그리고
나의 ‘외국인 울렁증’을 단숨에 치료해 준
마법 같은 손님이기도 하다.
사건은 어느 금요일에 시작됐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키가 190cm는 되어 보이는 외국인이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당장 시술을 원했지만,
예약이 꽉 차 있었고,
우리는 월요일 12시로 약속을 잡았다.
그가 나간 뒤부터
내 마음에 은근한 긴장이 시작됐다.
언어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서양인 커트는 여러 번 해봤지만
‘펌과 염색’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직접 해본 것과
머리로만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동양인과는 전혀 다른 가늘고 부드러운 모질,
약이 얼마나 흡수될지,
열처리는 몇 분이 적당할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번역기 앱을 새로 깔고,
그가 보여준 스타일과 비슷한 사진들을
밤새도록 캡처해 두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였다.
드디어
월요일 12시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찐빵이가 사고를 쳤다.
엉덩이에 응가를 잔뜩 묻힌 채
미용실을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 응가 냄새는
맡아본 사람만이 안다
그 미묘하고도 강렬한(?) 향기가
순식간에 미용실 공기를 장악했다.
도망 다니며 하악질까지 헤대니
잡을 수도, 닦을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그 향기로운(?) 공기 속에서
운명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민망함도 잠시.
긴장이 몰려오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상담을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웨이브 파마와
블랙 염색.
한국 손님이었다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지만,
상대는 미지의 모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나는 준비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최대한 솔직하게 설명했다.
컬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고,
유지력이 짧을 수도 있으며,
결과는 해봐야 알 수 있다고.
나의 비장함이
전해졌을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It’s okay. I trust you”
괜찮아요.
난 당신을 믿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롯드를 마는 내내
신입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펌 유지 기간을 묻는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I don’t know.”
전문가로서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예측할 수가 없으니
아무리 관광객이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사실들에
대충 둘러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는 또 한 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애매한 나의 대답에도
그 쿨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위로를 받았다.
시술이 이어지는 동안
나의 고양이들의 나이도 물어보고
그 역시 유기묘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사였고,
자신의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며 눈을 반짝였다.
한국을 좋아한다는 말도
미용실이 아담하고 분위기가 좋다는 말도 했다.
서툰 영어와 느린 대화였지만
시술 내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외국인 손님이라는 심리적 거리감이
나도 모르게 사라졌다.
마침내 시술이 끝났다.
다행히 펌은
꽤 잘 나왔다.
사진과도 거의 비슷했다.
거울을 본 그는
연신 “굿. 굿. 굿!”을 외쳤다.
하지만
전문가인 내 눈엔
2%의 아쉬움이 보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외국인 펌과 염색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미안해요."
"유지력은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감을 잡았으니.
혹시라도 다음에 한국에 오면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줄게요.”
그는 또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너무 마음에 들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화려한 기술보다
투박한 진심이
사람의 마음을 더 움직인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다가가면
사람은 그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을.
내 눈에는 2% 부족한 결과였지만
그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긴장한 낯선 나라의 미용사를
끝까지 믿어 준 고마운 손님.
나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감’을 잡았으니까.
다음에 다시 온다면
그때는
진짜 K-뷰티의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