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을 함께 버텨 준, 내 인생의 가장 고마운 사람
미용실을 오픈하고
만 5년이 지나서야
나는 첫 직원을 뽑았다.
10월에 찾아와
다시 10월에 떠나기까지
우리는 꼬박
7년을 함께했다.
그녀는
내 인생의 가장 고단했던 시기에 찾아와,
미용실이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순간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이다.
지금 되돌아봐도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때 나는 서툴렀고,
그녀 역시 어렸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 내기에도 벅찼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버텨냈다.
안암동에서 서초동까지
그녀는 7년 동안
단 한 번의 지각도, 결근도 없었다.
내가 나태해질 때면
그녀는 조용히 나를 일깨웠다.
“원장님, 이번 달 세금 내셔야죠.”
“카드값 안 내실 거예요?
그러면서
오히려 본인이 더 타이트하게 예약을 채우며
나보다 더 내 통장을 걱정해 주던 사람이었다.
직원이 아니라
동업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 아빠와 주말부부로 지내며
혼자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파도
예약 손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때면
그녀가 먼저 나섰다.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마중 나가
미용실로 데려왔다.
무더운 여름에도,
살을 에던 겨울에도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원장님 저는 너무 좋아요.
잠깐씩 바람도 쐬고 좋은 걸요.”
그녀는 직원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때로는 남편 같았고,
때로는 맥가이버 같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대신해
사적인 일까지 허물없이 도와준 그녀에게
나는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샴푸 하는 법부터 커트까지
하나하나 문서로 정리하며
기본을 단단히 잡아주려 했다.
베이직이 완벽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그래서 때로는
모진 말도 했다.
쉬는 날이면
봉사라는 핑계로 요양원과 교회에 데리고 다니며
실전 연습도 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다.
7년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크게 부딪힌 적이 없었다.
손님들에게 늘 상냥했고,
성실했으며,
배움의 열정이 가득했던 사람.
술 못 마시는 그녀를 앉혀두고
내가 먹고 싶어 회식을 가던
그 모든 시간이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다시는
그녀 같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녀가 퇴사하던 날.
몸이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남겨진 그 거대한 공허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까다로운 손님이 나를 지치게 할 때면
말하지 않아도
카운터에서 나를 바라보며
위로를 건네던 그 눈빛.
그 신호 하나에
나는 다시 힘을 내어 웃으며 손님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조용히 내 편이었다.
그녀의 퇴사는
단순히 직원 한 명이 그만둔 일이 아니었다.
내 일상의 한 부분이
통째로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손님들 역시
그녀가 없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다.
매년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나를 찾아온다.
우리는 최고의 팀이었고,
그녀는 훌륭한 디자이너였으며,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넓은 곳에서
자신의 길을 멋지게
개척해
독립에도 성공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대견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고
가장 빛났던 시절을 함께해 준 사람
우리 아이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그녀의 된장찌개와 계란프라이처럼
그녀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참 특별한 존재였다.
“고마웠어,
정말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