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감정은 추상적이기에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공연 <너를 위한 글자>는 사랑이라는 소재를 따뜻하고 깊이 있게 표현하며 관객을 맞이하였다.
<너를 위한 글자>는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 ‘마나롤라’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이다. 이 공연은 총 세 명의 등장인물인 ‘투리’와 ‘도미니코’, ‘캐롤리나’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발명가인 투리는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발명품을 만든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캐롤리나와 도미니코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소설 모임을 하며 시간을 함께하고 투리는 그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공연에서 비중 있게 다가오는 것은 투리와 도미니코의 관계 변화이다. 투리는 캐롤리나와 도미니코의 소설 모임을 방해하며 소설을 쓰는 도미니코를 무시한다. 이에 감정이 상한 도미니코 역시 투리가 만드는 발명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비아냥거린다.
그런 두 사람이 힘을 합치게 된 계기는 캐롤리나를 돕기 위해서다. 캐롤리나가 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녀를 돕기 위한 방안을 마련한다. 서로를 견제하기 바빴지만, 캐롤리나가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길 원치 않았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투리는 캐롤리나를 위한 발명품을 만든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도록,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을 곧바로 쓸 수 있는 혁신적인 물건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 이때부터 투리의 발명품은 독자적인 것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위한 애정에서 비롯된 물건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그가 처음 무언가를 만들게 된 계기는 그의 어머니였다. 매번 스스로가 만든 물건을 보여줄 때마다 그를 칭찬해주었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자신의 꿈을 지지해주었던 사람의 부재는 투리를 은둔형 발명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캐롤리나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와 열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발명품을 창조한다. 공연의 초반과 중반 각각에서 드러나는 투리의 태도 변화가 참 반갑게 다가온다.
공연에서 세 사람의 모습을 더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만드는 요인은 노래이다. 각 인물의 성격에 맞는 표정과 태도를 보이며 선보이는 아름다운 노래는 공연을 더욱 집중하게 한다. 특히 상황에 맞는 가사도 한몫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첫 번째 글감: 소나기>와 <도와줘>라는 제목을 가진 OST가 있다.
<첫 번째 글감: 소나기>의 경우 캐롤리나와 도미니코의 소설 모임을 방해하는 투리의 질투가 잘 느껴진다. 더불어 소나기라는 소재를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도미니코와 과학적 원리로 설명하는 투리의 노래 가사가 대비되어 웃음을 유발한다.
‘툭툭 무심히 떨어지던 빗방울, 두 손으로 가려봐도 피할 수 없던 소나기. 우산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온몸으로 소나기를 견뎌내는 것.’
vs
‘뜨거워진 열기로 가열된 지표면, 상승기류를 통해 만나는 차가운 공기.’
문학적 감수성과 과학적 설명이 충돌해 앞다투어 노래를 불러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가 가진 꿈을 무시했던 발언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특히 노래의 끝으로 갈수록 감정이 격해져 이마를 맞대고 서로가 느낀 소나기를 격렬하게 표현하는 모습은 둘의 관계를 회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관객의 걱정과는 달리 둘은 캐롤리나를 위해 서로가 가진 장점을 바탕으로 함께 의지하며 힘을 모은다.
‘도와줘. 이런 말 하기 자존심 상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도와줘>는 캐롤리나가 자신의 상황에 눈물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투리와 도미니코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도미니코의 인사조차 무시하던 투리는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넨다. 그 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캐롤리나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가 도미니코의 세계로 들어가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소설을 쓸 때 제일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발명품을 만들어내야 하는지에 대해 예의 있게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투리만이 아니다. 도미니코 역시 캐롤리나의 재능을 살리는 것과 함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발명품을 완성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 노래를 부르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는 캐롤리나가 꿈을 지켜내길 바라는 간절함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마침내 투리는 캐롤리나를 위한 발명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공연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너를 위한 글자'는 캐롤리나를 위해 만든 발명품인 타자기를 지칭한다. 투리는 타자기를 통해 캐롤리나가 계속 꿈을 향해 걸어 나가길 희망하고 캐롤리나는 투리의 바람에 부응해 자신만의 책을 완성한다. 이때 캐롤리나의 책을 통해 투리가 그녀의 첫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은 공연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세 명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비록 캐롤리나는 시력을 잃었지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투리와 도미니코 역시 자신의 꿈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지켜주고 싶은 간절함과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해 도움을 주고 싶은 절실함은 모두 누군가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공연의 끝에서 투리가 캐롤리나를 위해 타자기 사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눈물짓는 모습은 추상적인 사랑을 구체화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모두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서로를 지켜낸 방법은 사랑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결국 사랑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넉넉함이 아닌, 모자라도 꼭 줄 수밖에 없는 절실함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