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이 700회를 맞이했다. 그 흔한 시즌제 한번 없이 2010년 7월 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2024년까지 무려 14년간의 세월을 매주 일요일과 함께했다. 오랜 시간 방영해온 만큼 함께 해 온 팬층도 꽤 두터운 편이다. 그중 어린 시절부터 런닝맨을 봐 온 사람들을 ‘런닝맨 키즈’라고 부르는데, 나 역시 런닝맨 키즈 중 한 명이다.
2010년 학생 때부터 시작해서 2024년 지금까지 1회부터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런닝맨>을 시청했다. 남들이 모두 밥 친구로 <무한도전>을 외칠 때도 꿋꿋이 <런닝맨>을 보았고,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일 때도 핸드폰을 잡고 <런닝맨>을 틀었다. 그럼 어이없게도 마음이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런닝맨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런닝맨>은 나에게 예능 프로그램 그 이상이 되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예능이란 세계를 알려준 것은 <패밀리가 떴다>라는 프로그램부터다. 우연히 튼 텔레비전 속 그들은 한 시골집에서 게임을 하고 말싸움을 하기도 하며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어른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할 법한 게임을 하고 유치한 장난을 하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에게 어른이란 단정한 옷을 입고 특별한 감정의 동요 없이 점잖게 대화하며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내가 계속 <런닝맨>을 보는 이유는 어릴 때 예능에서 봤던 어른의 모습에 오히려 동경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존 사회의 체계와 관습에서 벗어나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로움과 재미는 현실과는 조금 다르다. 체면을 차리며 진지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한없이 유치하고 철이 없다. 감정에 솔직하고 본능적이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의리를 저버리며 다투다가도 옛 노래가 흘러나오면 함께 어울리며 어디서든 신나게 춤을 추는 낭만을 가지고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순간의 즐거움에 충실하는 그들의 모습은 기존 어른의 모습과 대조된다. 무릇 어른이란 감정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그런 성숙함이랬는데 화면 속 그들은 그 모습과는 거리가 참 멀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예능 속 그들의 모습은 주어진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어른의 모습이기도 하다. 버라이어티 예능의 목적에 맞게 초창기 이름표 뜯기 게임을 할 때는 옷이 땀범벅이 되도록 달리며 긴박한 장면을 연출했고, 숨바꼭질을 할 때는 쌀쌀한 날씨에 바다까지 뛰어가 숨기도 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수많은 게임을 하며 담이 오고 다리에 쥐가 나도 웃음으로 승화했고, 데뷔년도나 나이로 위계질서를 따지는 이에게 ‘선배님 무서워서 예능 하겠나’라는 식의 짓궂은 말로 서열을 의미없게 만드는 멤버들의 모습은 또 다른 어른의 세계를 체험하게 만든다.
이렇게 멤버들이 뽑아내는 웃음은 어떻게 보면 기계적이며 당연한 요소다. 그들이 그날그날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웃음을 추구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웃음에도 법칙이 숨어있다. 물론 멤버들이 매순간 이 법칙을 염두에 두고 촬영에 임하는 것은 아니어도 일반적인 희극의 원리는 아이들이 하는 놀이의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책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웃음의 기법을 총 3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첫 번째는 ‘반복’이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는 것에는 웃을 요인이 없지만, 그 우연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어이없어서 웃음을 터트리게 되듯이, 상황이 새로워도 등장인물이 늘 똑같은 상황이나 재난에 맞닥뜨린다면 그것은 웃음의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이는 <런닝맨>에서 유재석이 이광수의 말 끊기, 이리로 와 보라 하며 귓속말을 하는 듯하며 뺨 때리기, 그것을 매번 당하지만 또 당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이광수, 멤버들 사이에서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전소민. 그럼에도 매번 속고 분해하는 멤버들 사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멤버들도 항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배신한 상대를 잊지 않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보복을 하는 방식, 바로 웃음의 기법 두 번째인 ‘역전’이다.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역할이 바뀌게 되면서 희극적 장면을 얻는 것이다.
대표적인 배신 캐릭터 이광수를 중심에 두고 멤버들은 그를 골탕 먹일 궁리를 한다. 일단 시작은 늘 이광수 본인이다. 야외 촬영 중 한 멤버의 얼굴에 나비가 붙었다는 이유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만보기를 절대 흔들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자신의 손에 상대의 만보기가 주어지면 신나게 흔들며 배신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내 자신이 친 그물에 걸려드는 사람의 이야기로 변화한다. 나비가 붙었다는 이유로 상대를 때렸지만, 기가 막힌 우연으로 자신의 얼굴에도 나비가 앉음으로 인해 똑같이 맞게 되는 상대의 보복, 상대의 만보기를 빼앗아 흔들었지만, 어딘가 허접해 자신의 만보기도 상대에게 내어주고 마는 어리숙함은 그를 속임수를 당한 사기꾼 이미지로 나타낸다.
더불어 <런닝맨>의 희극성이 고조되는 이유 중 하나는 멤버 저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돌발성 캐릭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믿었던 멤버가 배신을 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서로 간의 착각으로 고조되는 그들의 싸움은 웃음의 기법 세 번째인 ‘사건들의 간섭(착각)’이다. 이 효과는 주변 인물들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런닝맨>의 경우 이러한 간섭에서 서로 간의 다툼이 발생하고 미션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가령 만보기를 빼앗은 멤버가 게스트인 줄 모르고 서로를 의심하다가 절정에 다다르는 피싸움, 스파이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서로 배신하며 자멸하고 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를 통해 본 희극의 목표는 ‘기계화’된 삶이다. 상황과 그에 따른 미션이 달라지더라도 반복되는 웃음 구조와 그 체계를 앞뒤로 뒤집어 보아도 이상이 없는 관계나 행위는 희극과 의미를 같이한다. 이런 희극은 삶과는 대조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기계적 삶이 아닌, 끊임없는 일과 함께하기에 방심할 수 없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희극을 통해 불안한 삶을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변수가 너무나 많은 삶의 불완전함 속에서 안정되고 반복된 웃음 요소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한 희극의 의미가 아닐까.
700회를 맞아 런닝맨 멤버들은 어김없이 시청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시청해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며 고개를 숙였다. 700번을 함께 해 온 시청자로서 <런닝맨>은 시간의 흐름을 방증해왔다. 함께 해 온 멤버 중 한 명이 하차할 때 이미 그가 <런닝맨>과 함께 한 시간은 10년이 지나있었고, 멤버가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아도 따져보니 6년이 훌쩍 넘어있다. 이렇게 시간이 빠른가 싶다가도 내가 보내온 시간, 쌓아온 내 나이와 비교해보면 납득하게 된다. 그만큼 <런닝맨>은 오랜 시간 꾸준히 같은 곳에서 나와, 우리와 함께했다.
사실 오래 한 만큼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방영되는 회차들 위주로 살펴봤을 때 반복되는 소재와 늘어지는 편집, 조금은 허망한 추리 내용 등이 그렇다.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빌려보자면 관습적으로 계속 사용하다 보니 원래 있던 희극적 효력이 약해진 탓이다. 아무래도 14년이란 세월을 쉬지 않고 하니 기존에 재미있었던 요소들도 이제는 별 감흥이 없는 것이 한몫한다. 언제가 끝이 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더욱더 다양한 <런닝맨>만의 모습을 보고 싶은 바람이다.
앞으로도 나의 일상 중 일요일 저녁은 항상 <런닝맨>과 함께할 것 같다. 10년을 넘게 시청해오니 재미 요소를 떠나서 이제는 <런닝맨>을 보는 것도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가면 주위 환경을 비롯해 함께했던 사람들도 변하고 떠나가기 마련인데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오로지 웃음만을 위해 고민하는 이들을 보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런닝맨>을 보며 지나간 추억을 곱씹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런닝맨>을 본다. 이동시간이 지루할 때도 혹은 혼자서 밥을 먹을 때도. 보다 보면 그들에 이입하여 어느새 함께 웃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하는 웃음은 언제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