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뮤지컬 <레드북>

by epigram


사회와 세상이 정한 규격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규범에 맞게 혹은 단계에 맞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이 개성이자 새로운 도전이라고 여길 수 있음에도 남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위축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기까지 할 때 인생은 선택에 직면한다. 계속 나의 길을 개척할 것인지, 한발 물러설 것인지.

뮤지컬 <레드북>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여성에게 순종과 희생을 강요하던 시대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자신답게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물의 삶을 그렸다.



공연은 주인공 ‘안나’가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면서 시작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고, 성희롱을 당했지만,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이도 안나일 뿐이다. 그만큼 당시의 사회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글로 써나가며 소설을 만든다. 주변의 시선과 손가락질에도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안나의 모습은 다른 여성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띌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레드북>은 쉽게 나아갈 수 없는 안나의 삶을 따라가지만, 그와 대비되는 그녀의 행동을 보는 재미가 매력을 더한다.


안나의 유산 상속 문제를 위해 그녀 앞에 나타난 변호사 ‘브라운’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자 사회의 규범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된다. 한 부부의 이혼 소송을 두고 사랑의 가변성에 의아해하는 브라운은 이때까지만 해도 꽤 고지식하고 시대의 도덕적 근간에 충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에 맞서며 사랑은 날씨처럼 변한다는 안나의 말을 통해 나중에는 그 의미를 수용하는 그의 모습은 안나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정한 성장으로 나아간다.


안나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그가 레드북을 저질스럽다고 표현할 때도 그의 행동에 상처는 받았을지언정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안나의 모습은, 마침내 브라운이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가치조차 변화시킨다. 이후 브라운은 안나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도 상황을 회피하며 그녀의 행동을 신경쇠약으로 둘러대는 것이 아닌, 레드북이라는 소설 자체에 집중하며 책을 읽은 독자의 긍정적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표면적으로는 부도덕하다고 여겨진 레드북이 사실은 많은 독자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대에 억눌렸던 것들이 실제로는 자유로워질만한 근거가 충분했음을 깨닫는 순간으로 변모한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인물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기는 쉽지만, 그 주체가 자신이 되어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안나처럼 주위의 편견과 시선에서 늘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과 당당함으로 끝내 주변을 설득시키고 마는 그녀의 삶은 뮤지컬 넘버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일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하며 부른 “난 뭐지?”, 혼란과 좌절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며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이제는 그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며 새로운 도약을 응원하는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까지. 사회의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자신을 마냥 검열하지 않고 진실과 진심을 이야기했던 인물의 모습은 마침내 또 다른 누군가의 꿈으로 귀결된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요
거짓된 말들이 고요해질 때까지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요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레드북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굳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 당시의 현실이 안타깝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고 침묵을 강요받던 시대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했던 이가 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나의 외침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억눌린 이들을 위한 용감한 선언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사회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지난하게 여겨지는 삶과 시선 속에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눈 딱 감고 용기를 내보자. 각자의 사정으로 쓰인 이야기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희망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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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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