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정 fin
우리는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위수정 작가의 신작 <fin>은 서로 다른 삶을 살지만, 함께 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서로의 인생을 조명한다.
이 책은 배우인 ‘기옥’과 ‘태인’, 그들 각각의 매니저인 ‘윤주’와 ‘상호’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의 주연 배우인 기옥과 태인은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이 시작될 때 한없이 화려하지만, 그 뒤편의 삶은 저마다의 우울과 외로움, 좌절과 열등감 등이 짙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매니저 윤주와 상호는 때론 이들의 고민과 푸념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배우의 삶은 사생활을 비롯한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들에 신경 써야 한다. 연극이 끝난 후 마련된 술자리에서 태인은 술에 취해 기옥에게 스캔들과 더불어 대답하기 곤란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만, 기옥은 그에 대응하지 않는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스태프의 눈동자가, 지금은 조용하고 예의 있는 이들이 익명으로 어떤 말을 올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소한 언행으로 한순간 골로 갈 수 있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태인의 술주정으로 술자리가 황급히 마무리된 후 다음날 기옥이 들은 소식은 사고로 인한 그의 사망 소식이다. 동료의 사망 소식에도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카메라에 어떻게 비출지’이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대신 피부과에 가고 검은 옷에 모자를 쓸지 말지 고민한다. 예상대로 장례식장 입구부터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허리를 펴고 천천히 걷는다.
기옥의 매니저 윤주는 가끔 기옥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실패야. 실패작.
선생님은 실패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 같아요.
네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윤주의 눈에 보이는 기옥은 하는 일에 비해 돈을 쉽게 벌고 많이 번다. 윤주의 기준에서 기옥은 엄청난 부자임에도 잠깐 일을 쉬면 앓는 소리를 해댄다. 그만큼 쉽게 벌었으면 스캔들 정도는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이 가진 부는 노력만으로 얻는 것일까. 윤주는 기옥의 푸념을 들으며 요양원에 가 할머니를 보살피고 언제쯤 대기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한다.
태인의 매니저 상호의 삶도 비슷하다. 상호는 술에 취한 태인이 자신에게 가난에 대한 사정을 털어놓는 게 언제부턴가 와 닿지 않는다. 상호의 눈에 비친 태인의 가정은 연극계의 원로 연출가인 아버지, 영화계에서 활약한 고모, 그 외 예술 쪽에 몸담은 사촌들이 그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집안이기 때문이다. 상호에게 진짜 가난은 배우라는 꿈이 있었지만 포기하고,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모른 척하고, 갖고 싶은 게 있어도 그것을 숨길 줄 아는 것이니까.
오닐은 비극을 제대로 알아. 아니, 그냥 삶 자체가 비극인 사람이야.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해, 어리석어.
(중략) 내가 말이야, 이제는 내 미래를 연기하게 되는 거 같네…….
화려해 보이는 배우의 삶은 그 속을 자세히 비춰보면 여러 사정이 있다. 태인은 아내의 생일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집에 가는 날보다 지방 숙소에 머무르는 일이 더 많다. 차 안에서는 태인의 언성이 높아지는 통화가 반복된다. 그 소리를 그대로 듣는 상호는 왠지 모르게 가정불화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를 볼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어서. 대다수가 이러한 이유를 들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가까이 지켜보는 누군가의 삶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기옥은 윤주에게 부럽다는 말을 쉽게 꺼내고 태인은 상호의 가정사는 모르면서 자신의 가난은 연민한다. 윤주나 상호는 어떤가. 윤주는 기옥의 여러 사생활은 그녀의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상호는 태인이 하는 말들을 “아 정말요?”, “대단하십니다.”와 같은 영혼 없는 대답으로 채운다.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를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가까이 있으며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여도,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도 그 속에는 그 행동과 반대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것. 누군가가 보기에 초라해 보이고 한없이 작아 보여도 ‘나’라는 사람 없이 삶은 계속될 수 없다. 연극의 막이 내리는 순간은 또 다른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삶은 끝난 것 같아도 계속될 수 있고, 하나의 배역이 끝나면 또 다른 배역이 주어지기도 한다. 내 것이 아닌 다른 배역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배역에 충실해 연극을 해나가자. 그렇다면 그 끝에 혹여 환호가 없을지라도 무대 위의 암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fin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