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이나래-15화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래는 새벽부터 잠이 깼다.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잠을 밀어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일본 남자.
낯선 문화, 낯선 언어, 낯선 사람… 모든 게 낯설어 더 떨렸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꺼낸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도 평소엔 하지 않던 걸 조심스레 따라 해 봤다.
“이거 너무... 나 소개팅해요!라고 광고하는 느낌 아냐?”
나래는 거울 속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도 마음이 분주했다.
오오쿠미와 함께 삿포로로 가기로 했다.
삿포로에서 후카가와까지는 특급 열차로 한 시간 남짓.
누군가에겐 일상이겠지만, 나래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서 멀어지고, 시계의 초침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손바닥은 땀에 젖고,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나래! 오늘 무슨 일 있어?"
쉬는 시간, 마사가 시원한 캔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왜? 오늘따라 누님이 예뻐 보여?"
나래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찡긋 윙크를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때 오오쿠미가 옆에서 말했다.
"나래 오늘 소개팅해.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영화관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 소개해줄 거야."
나래는 마사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마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잘하고 와."
짧은 한마디 뒤, 그는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엔 묘한 체념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미안해, 마사. 하지만… 너의 마음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야.’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서려던 참, 복도에서 야마구치 씨가 다가왔다.
"나래야, 오늘 너 소개팅한다며? 삿포로로 간다고 들었는데 맞아? 그럼 오늘 내 차로 갈래? 오오쿠미랑은 몇 번 같이 간 적 있어. 특별한 날이니까 약속 장소까지 바래다줄게."
야마구치 씨는 같은 과의 사회인 학생으로, 올해 예순한 살.
삿포로에서 꽤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했다.
학생들과도 격 없이 잘 어울리는, 인상 좋은 선배였다.
"제가 신세를 져도 될까요?"
나래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신세는 무슨…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주차장으로 향하며, 나래는 슬쩍 기대를 품었다.
‘어떤 차일까…?’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은빛 BMW 스포츠카.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컨버터블이었다.
"설마… 이 차가…"
"왜? 나 같은 할머니가 이런 차 타면 안 돼? 나 원래 스포츠카 좋아해."
야마구치 씨는 활짝 웃으며 뚜껑을 열었다.
“시원하게 바람맞으며 가자고!”
오오쿠미는 뒷좌석에, 나래는 앞 좌석에 앉았다.
차가 부드럽게 교정을 빠져나가던 그때,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마사의 모습이 나래의 눈에 들어왔다.
"마사! 나 잘 다녀올게!"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마사는 잠시 멈춰 서서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짓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삿포로 팩토리 극장 앞, 오후 5시.
“저기 저기! 타카하시가 나온다!”
오오쿠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나래의 숨이 멎었다.
극장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일본인치고는 큰 키에,
깔끔하게 쓸어 넘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정돈돼 있었다.
커다란 눈,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도… 그를 감싸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이런 사람이… 정말 존재한다고?’
나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비주얼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오오쿠미 씨~!"
타카하시는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목소리마저 부드러웠다.
"타카하시! 오늘 일하느라 수고했어. 아! 오늘의 소개팅 상대, 이나래야.
한국에서 우리 학교로 유학 온 친구야."
타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카하시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나래는 고개를 숙인 채 겨우 말을 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나래라고 합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타카하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화관의 채도가 낮은 조명에도 타카하시의 얼굴은 따스한 봄볕을 머금은 듯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래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떨렸다.
‘이게 바로… 첫눈에 반한다는 걸까?’
�작가의 말
실제로 저는 이 소설에 쓴 것처럼 홋카이도에서 소개팅을 했습니다.
소설에 쓴 사람과는 이름이 달랐지만,
제가 만나본 남자 중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었을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만큼 잘생긴 남자가 나와서 놀랐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때의 설렘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제 나이는 벌써 마흔여덟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그리고 타카하시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다음에... 아사히카와에서 다시 한번 뵐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