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16
영화 같은 소개팅, 달콤한 배려와 평범한 마음 사이. 나래의 감정은 어디로 향할까?
재즈가 흐르는 바에서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다는 것
. 한국에서 새내기 시절 선배들과 학교 앞 호프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던 나래에게는,
이 모든 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바텐더가 능숙하게 칵테일을 섞으며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곳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오오쿠미의 남자친구가 합류하자 분위기는 한층 더 활기찼다.
자동차 영업을 한다는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었고,
나래도 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녹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나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타카하시였다.
이나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조용히 몸을 기울여 집중해 주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걸 알자 물을 챙겨주었다. 이나래가 좋아하는 안주를 살짝 그녀 앞으로 밀어주는 세심함까지.
그의 작은 배려 하나하나에 이나래의 가슴은 조금씩 두근거렸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움찔하면서도 그 거리가 싫지 않았고, 손끝이 스칠 때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마주치는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고, 갑자기 일본어도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였다.
이런 감정이 낯설면서도 오히려 달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내가 이런 사람과 소개팅을 하다니. 하지만... 내가 이 사람과 어울릴까?'
타카하시는 어디서든 호감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따뜻한 성격까지, 분명 주변에 여자가 많을 것 같았다.
반면 이나래는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만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쌍꺼풀도 없고 코도 오뚝하지 않으며, 입술은 얼굴 크기와 비율이 맞지 않게 유난히 도톰했다.
유일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긍정적인 성격과 발랄하고 웃음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나래에게 우선인 것은 학업과 아르바이트였다. 학점을 잘 받아야 해서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 가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했다. 그래서 지금 연애까지 하는 건 이나래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타카하시는 오히려 그런 이나래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나래의 솔직한 표정과 가끔 어색하게 튀어나오는 일본어가 무엇보다 귀여웠다. 자신보다 한 살 많다고 했지만 어리게 보이는 얼굴과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밝은 모습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자꾸만 이나래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 아사히카와에 가서 같이 영화 볼래요? 후카가와에는 영화관이 없잖아요. 제가 후카가와까지 가서 역에서 만나서 같이 아사히카와에 가는 건 어떨까요?"
이나래는 살짝 당황했지만,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음... 글쎄, 시간 되면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시간을 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타카하시는 잠시 망설이더니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를 알아야 약속을 잡을 수 있잖아요. 알려줄래요?"
이나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후, 이나래의 핸드폰 화면에도 타카하시의 번호가 표시되었다.
"혹시 쉬는 날이 언제예요? 제가 그 날짜에 맞춰서 극장 아르바이트 휴일을 바꿀게요."
타카하시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이나래에게 다가왔다. 이나래에게는 유일하게 수요일이 쉬는 날이지만, 그날은 중앙병원에서 한국어 교실이 있는 날이다. 그리고 소에다를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쉬는 날이 거의 없어요. 주말에는 수영장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제가 이자카야 점장님께 화요일이나 목요일 하루 쉴 수 있을지 여쭤보고 문자 드릴게요."
"그럼 약속해요. 문자 꼭 주기로요."
타카하시는 손가락을 이나래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나래는 살며시 타카하시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타카하시는 코끝을 찡긋하면서 이나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 오오쿠미의 집으로 돌아왔다. 삿포로의 2 LDK 아파트였다.
하와이를 좋아하는 오오쿠미의 집은 화려한 하와이풍 커튼이 쳐져 있었고 하이비스커스 꽃 장식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어른스러운 오오쿠미와는 언밸런스한 그녀의 방에 이나래는 미소가 지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오오쿠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타카하시 어땠어? 잘생겼고 성격 좋지?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데 부끄러움이 많아서 말도 잘 못 해. 그런데 오늘은 나래한테 꽤 적극적이어서 놀랐어."
이나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일본어가 어색한 게 타카하시한테 신선한 것 같더라고요."
오오쿠미는 이나래를 빤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꼭 국적 때문일까? 타카하시가 여자와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처음 봤고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봐서 솔직히 깜짝 놀랐거든. 어찌 됐든 나래를 편하게 생각하나 봐."
이나래는 오오쿠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아닌 누나로써 편해서 그랬던 것일까?
잠자리에 누워 천장에 모빌처럼 흔들리는 하이비스커스 꽃 장식을 바라보았다. 타카하시의 얼굴이 갑자기 눈앞에서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삿포로에서 후카가와로 향하는 특급 열차에 올라탔다.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홋카이도의 초록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뒤로 밀려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나래는 어제 소개팅을 다시 곱씹었다.
1시간 정도 달리자 익숙한 후카가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홋카이도 대학교 타쿠쇼쿠 단기대학을 지나, 철도 옆 제2 센트럴 하우스를 지나갔다. 후카가와 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실내에 흘러나왔다.
이나래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홋카이도에 온 지 벌써 3개월. 어느새 이곳의 삶에 꽤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후카가와시는 이나래에게 제2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하자 마사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래, 어제 소개팅 어땠어?"
이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정말 잘생긴 남자가 나타났어! 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잘생긴 남자. ㅎㅎㅎ 마사도 봤으면 정말 놀랐을 걸?"
그 말을 들은 마사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왕 소개팅 나간 거 잘생긴 사람 만나서 좋았겠다."
마사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혀를 쏙 내밀더니 이나래의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이나래는 왠지 그 뒷모습이 전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뭔가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마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 한국어 교실이 있는 날이다. 소에다와 미나코를 만나는 날이다.
이나래는 중앙병원에서 병원 직원과 로터리클럽 회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굉장히 재미있었다. 이나래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삶에 활력소가 되었고, 학교에서의 어려움과 고민을 털어놓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소에다는 한국어 교실이 끝나면 이나래를 데리고 삿포로나 후카가와에서 맛있는 식당에 데려다주었다. 가끔씩 미나코가 함께 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소에다와 이나래 둘만 가는 일이 더 많았다.
소에다는 이나래에게 인생의 선배이자 좋은 사람이 되어주었다. 이나래는 어제 있었던 소개팅을 소에다와 미나코에게 말할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이나래가 좋아하는 노란 꽃들이 하나둘씩 피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새롭게 움트기 시작하는 자연을 하나하나 느꼈다. 시원한 6월 초의 바람이 이나래의 몸을 간지러혔다.
그때 이나래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타카하시였다.
40%쯤은 저의 이야기인 이 소설을 쓰면서,
어쩐지 오래전 제 발자국을 따라 걷는 기분이 듭니다.
글을 쓰는 동안,
20대의 나를 다시 만난 것 같아서
요즘은 제가 마흔이 훌쩍 넘었다는 것도 잊고 지내고 있어요.
매일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