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17화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입니다.
시간 있을 때 들어보세요.’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둔 채,
나래는 타카하시의 메시지를 응시했다.
오늘 새벽까지 함께 있었는데도
벌써 며칠이 지난 듯한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더 블루 하츠의 '키스시테 호시이'?”
나래는 중얼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키스하고 싶다’는 뜻의 일본어 제목이라니.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처음 들어보는 밴드 이름이네요. CD 사서 들어볼게요.]
문자를 보낸 후 나래는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온몸으로 밀려오는 바람에 저항하느라 잠시 휘청거렸다.
6월 중순의 바람은
봄과 여름 사이를 헤매며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노란 커튼 사이로 스며든 바람을 맞으며,
나래는 지친 몸을 소파에 맡겼다.
일본어에 익숙해졌다 해도
전공 수업이 있는 날은 유난히 지쳤다.
생소한 바이오 용어들, 유기농업 전문용어,
끝없이 이어지는 시험과 리포트.
컴퓨터 없이 모든 걸 손으로 써 내려가는
나래에게는 아날로그적 유학생활이 때론 벅찼다.
침대 위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이불이 단정하게 깔려 있었다.
연꽃과 수국이 수 놓이고,
핫핑크와 노란색이 어우러진
촌스러운 이불.
하지만
이것은 유학을 떠나오기 전, 나래의 엄마가 직접 포목점에서 골라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 이불속에 파묻힐 때면
엄마의 품 안에 있는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
6시, 한국어 교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창밖 바람과 은은한 라벤더 향, 그리고 멜로디가 겹쳐지면서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때, 불현듯
‘준철’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2년간 짝사랑했던... 지독히도 짝사랑했던 사람...
사실 그 사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
대학을 자퇴하고
유학이라는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홋카이도의 바쁜 일상에 묻혀 있던 기억이
우타다 히카루의 목소리를 타고
되살아났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래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띠링—하고 문자 알람이 울렸다.
[나래야, 오늘 한국어 수업 끝나고 같이 저녁 먹을 수 있을까?]
소에다 선생님의 문자였다.
나래는 반가운 마음으로 답장했다.
[당연하죠! 뭐 먹을까요?]
[초밥 or 파스타. 두 개중에서
나래가 먹고 싶은 것 골라.]
나래는 오랜만에 연어 초밥이 먹고 싶었다.
늘 가장 좋아하던 메뉴였기에
그 생각만으로도
입 안 가득 부드러운 기름기와
연어 향이 퍼지는 듯했다.
[초밥요! 오늘 연어 초밥이 너무나 먹고 싶어요]
소에다에게 답장을 마친 나래는
베란다로 나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햇살,
상쾌한 바람.
몸에 달라붙는 습기 하나 없는 홋카이도의 6월.
그 계절이 사랑스러웠다.
저녁 6시 50분.
중앙병원 회의실.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원장님 부부,
노인 케어 센터의 원인 미나코 ,
소에다 선생님,
내과 의사, 로터리 클럽 총무까지.
이들에게 나래는
한국어 선생님이라기보단
귀여운 한국인 여학생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언제나 성실히 참여해 주었다.
“오늘은 ‘~을 좋아합니다’ 표현을 배워볼게요.”
화이트보드에 예문을 적으며
나래는 평소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이끌었다.
소에다는 그런 나래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수업이 끝나자
소에다가 조용히 다가왔다.
“오늘 수업 재미있었어.
이렇게 배우다 보면 한국어 금방
늘 것 같아. 오늘은 특별히
초밥집을 삿포로에 예약했는데, 괜찮을까??”
“와! 삿포로까지요? 너무나 좋죠! 대박이에요!”
나래의 들뜬 목소리에
미나코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야?”
“미나코 짱! 소에다 선생님이 삿포로에서 초밥 사신대요.
같이 갈래요?”
순간, 소에다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선생님, 제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미나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예약 인원을 늘릴 수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소에다는 잠시 밖으로 나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능하다고 해요. 함께 가시죠.”
나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에다의 얼굴에 스치는 실망스러움을
나래는 읽어낼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소에다의 차에 올랐다.
미나코가 조수석에,
나래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고속도로를 부드럽게 달리는 동안
미나코는 소에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소에다는 간간이 룸미러로
조용히 앉아 있는 나래를 살폈다.
나래는 살짝 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 나래를 바라보는 소에다의 시선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미나코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고속도로.
세 사람의 감정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